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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진 Oct 04. 2016

분홍색은 모두의 색이야

페미니즘 교육 1 

슈퍼맨도 분홍색과 키티를 좋아할 수 있어!


* '페미니즘 교육' 시리즈는 제가 현장 교사로 일하면서 교육현장에서 느꼈던 페미니즘 교육 이슈들을 소개하는 기획입니다. 첫 글은 제가 '행복한학교'라는 초등 대안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의 한 에피소드입니다.


행복한학교에 완연한 봄은 더디게 오고 있었다. 바람에서 아직 겨울의 냄새가 나곤 했다. 구름은 0학년 교실로 들어섰다. 세 번째 맞이하는 우리말과 글 수업시간이었다. 구름은 지난 시간에 함께 읽은 동화책 <바다를 보러 갈 거야>를 가지고 색칠 놀이를 하자고 약속을 했기에 아이들에게 색연필을 준비시켰다. 아침부터 효정이의 지원을 받으며 제작한 불법복사 동화책을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먼저 하얗게 빈 제일 앞 장에 자기만의 새 제목 붙이기를 하자고 했다. 수민, 수현, 유라는 기존의 제목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대로 하고 싶다고 했다. 별이는 동화책의 두 주인공을 따서 여우와 똑떼비(족제비의 어린이어)라는 새 이름을 붙였다. 표지의 여백에는 각자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마음껏 그리게 했다. 수현이와 유라는 제목을 멋있게 쓰고 싶었는지 제목 쓰기에 집중했고, 수민이와 별이는 제목을 후딱 쓴 후 색색으로 표지를 장식해나갔다. 구름은 아이들만의 소중한 동화책이 탄생해 가는 어여쁜 과정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표지 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 이제는 흑백사진이 되어버린 동화책의 세계를 다시 반짝반짝 빛깔의 세계로 되살리는 시간. 구름이 말했다. 


"음.. 색은 자기가 칠하고 싶은 색을 마음껏 칠하면 돼. 꼭 원래 책이랑 같을 필요는 없어. 그리고 동화책 속에 자기가 그려 넣고 싶은 게 있음, 마음껏 그려 넣어도 돼~"


아이들은 구름의 말을 채 듣기도 전에 이미 동화책 속에 빠져 있는 듯했다. 이미 다들 열심히 색을 칠하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이 칠한 밤하늘의 색깔은 아이들의 개성처럼 서로 다르게 빛났다. 네 아이 모두 원래 동화책의 색을 조금씩 따라 칠했지만 신기하게 서로 조금씩 다른 색을 써서 모방했다. 언어라는 그물에 사로잡힌 어른들은 보라 빛을 보면 모두 개념적으로 보라색이라고 쓰여진 색연필만을 고른다. 그러나 말을 배우기 전의 아이들은 달랐다. 언어로 세계를 보지 않고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아티스트였다. 


소설가 배수아가 번역한 동화책 <바다를 보러 갈 거야>. 내가 가장 사랑하는 동화 중 하나다.


"구름, 벽지만 색칠해줘."


수민이가 색칠하는 게 힘들었는지 도움을 요청했다.


"무슨 색으로 할까?"

"책이랑 같은 거"

"분홍색?"

"응"


구름은 분홍 빛깔로 벽지를 채색해나갔다. 그러다 문득,


"우와, 구름 방도 분홍색으로 칠하면 좋겠다~"


구름의 말을 듣고는 수민이가 히죽 웃으며 곧바로 말했다.


"분홍색은 여자 색이잖아~ 구름은 남잔데."


"어? 분홍색이 여자 색이야. 구름 생각에는 아닌 것 같은데. 구름은 남자지만 분홍색 좋아하는데?"


구름은 속으로 색과 성에 관련한 고정관념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하려고 대사를 촤르륵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분홍색은 여자 색 아니야~ 그런 건 없어."


따라서 벽지를 분홍색으로 칠하고 있던 별이의 말이었다. 이어서 수현이와 유라도 분홍색은 여자 색이 아니야~라고 말했다. 


분홍 곰이라고 해서 모두 여자 곰인 것은 아니다. 혹시 여러분은 이 곰이 여자아이라고 생각하셨나요?


"수민아, 분홍색이 여자 색이면 니가 갖고 있는 크레파스 통은 파란색이잖아. 그럼, 파란색은 남자 색인데. 너는 파란색 좋아하잖아."


수현이가 또록또록하게 말했다. 구름은 아이들의 대화를 재미나게 지켜봤다. 


"나는 파란색을 좋아하진 않아."


수민이의 반론. 


"그래도 분홍색이 여자 색인 건 아니야."


수현, 유라, 별이가 한 목소리를 냈다. 


"색에 여자 색, 남자 색 그런 건 없어. 그치 구름?"


유라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아이들의 대화를 싱긋거리며 지켜보고 있던 구름이 짐짓 공평한 사또처럼 이야기했다. 


"구름이 생각하기에도 색깔에 여자 색, 남자 색이 따로 있지는 않은 것 같아. 분홍색도 파랑색도 모두의 색깔이 아닐까. 이제 수민이도 이해했을 거야."


수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던 이야기는 이내 양떼구름처럼 흩어지고, 아이들은 평온한 모습으로 다시 색칠하기에 열중했다. 지구별 위의 모든 다툼이 이처럼 평화롭게 해결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평화였는지, 온전한 해결이었는지는 좀 더 두고 볼일이라고 구름은 생각했다. 


색으로 인간의 특성을 판단하는 일.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시작이 아닐까?


수업이 끝나고 구름은 세 아이의 강한 주장에 밀려 혹여 수민이가 자기의 말을 온전히 다 풀어내지 못한 것은 아닐지. 행여 마음의 생채기가 난 것은 아닐지. 걱정이 들었다. 다음에 또 비슷한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소수의 의견을 가진 아이에게도 마음껏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지 하고 반성했다. 어른의 권위로 이해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아이들의 높이로 내려가 평등한 지위에서 바라보고 함께 마음을 모아 이해해 나아가야지. 어른의 생각은 옳고 아이들의 생각은 틀렸다 라는 것만큼 무모한 어른의 오만이 또 있을까.


2007.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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