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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진 Jun 28. 2017

오버 더 펜스 / 아마도 다시 봄날이 오지 않는다면

야마시타 노부히로 <오버 더 펜스>



아마도 다시 봄날이 오지 않는다면


2017년의 봄이 왔고, 지나갔다. 2017년의 봄을 우리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여러번의 봄을 맞이할 것이지만, '봄날'이라 칭할 수 있는 인생의 봄은 역시 단 한 번 지나갈 뿐이다. 나의 봄은 이미 분명 지나갔다. 아마도 다시 봄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시라이와(오다기리 죠)와 사토시(아오이 유우)는 나와 같이 봄을 지나 보낸 사람들이다. 시라이와는 계절과 함께 삶을 잃었고, 사토시는 사랑을 잃었다. 이건 광고 카피의 이야기이다. 더 분명한 사실은 시라이와는 사랑해본 적이 없었고, 사토시는 (본인이 삶을 제대로) 살아가본 적이 없었다. 서로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삶과 사랑마저 잃어버린 두 사람은 이제 빈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인간으로서 지구 위에 버티고 있지만, 과연 인간답다고 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손에 쥐고 있지 않다. 스스로 동물원의 펜스 속으로 걸어들어간 동물 마냥 그들은 펜스 밖의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을 단지 멍하니 지켜볼 뿐이다. 그저 하루하루 목숨을 이어가며. 동물원의 펜스 밖으로 나와야 한다는 생각마저 잊은 채로. 


낮에는 퇴락한 놀이공원 관리인으로 밤에는 유흥주점의 접객원으로 일하는 사토시. 동물원에서 나는 법을 잊어버린 새들의 구애 행위를 흉내내는 것을 즐긴다.


삶이 없는 사람에게는 사랑이 희망이고,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는 삶이 등대다. 사토시는 '사랑이 있다면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믿고 있다. 시라이와는 '사랑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걸까' 궁금하다. 두 사람의 믿음, 의문과는 관계 없이 둘은 마주치고, 차가운 눈을 녹이고 솟아나는 새순과 같은 사랑이 자기들 속에 돋아났음을 감지한다. 사토시는 이번에는 나를 구원해줄 진정한 사랑일까 확인하려 하고, 시라이와는 이번에도 똑같은 결말을 맞이할 흔한 사랑이겠지 하며 눈 감으려 한다. 


사랑이란 것이 그렇게 대단한가. 20세기 내내 인간은 '사랑'을 에베레스트 산 정상 즈음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저 위대한 사랑을 보라고 100년 동안 외쳐왔다. 음악, 문학, 미술, 영화, 공연 등등 모든 예술이 사랑으로 향해 있다. 그러나 어디 시중의 사랑이란 게 그리 대단한가. 3초면 깔 수 있는 소개팅 앱을 통해서 유통기한 일주일 가량의 사랑을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사랑이 흔해지니, 사람들은 '진짜 사랑'을 발명했다. 진짜 사랑은 다르다고 한다.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 올려둔 것은 소개팅 앱을 통한 사랑이 아닌 '진짜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삶이 없는 사람에게는 사랑이 희망이고,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는 삶이 등대다.


어쩌면 우리들이 잃어버린 봄날은 그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 가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진짜 사랑'이 있다면 말이다. 사실, 이 지구에 실제로 일곱 개의 드래곤볼이 있고, 그것을 모두 모아 "나와라! 신룡!"이라고 외치면 세 가지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레벨의 이야기이다. 드래곤볼이 없듯이, 에베레스트 정상 위에도 우리가 놓친 봄날은 없다. 


어떤 우리들은 어디로 가야하는지도 모른 채, 공백한 언덕을 힘겹게 오르고 있다


아마도 다시 봄날이 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만 할까. 


이번 사랑은 나를 구원해줄지 몰라.

이번 사랑도 뻔할 거야. 


두 말은 서로 다른 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효력을 지닌 말이다. 바로 우리를 우리가 도망쳐 들어온 펜스 속에 더욱 단단히 가두는 효력. 그런데 묘하다. '사랑'을 '삶'으로 대체해도 마찬가지의 효력을 낸다. 


이번 삶은 나를 구원해줄지 몰라.

이번 삶도 뻔할 거야. 


펜스 속에서의 나른한 삶. 우리는 삶을 잃어버린 것일까, 사랑을 잃어버린 것일까. 혹은 둘 모두일까.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삶 외의 다른 모습의 삶, 우리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사랑 외의 다른 대상과의 사랑. 모두 나를 구원해주지도 않지만, 그렇게 뻔하지도 않다.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다른 사랑과 삶으로 인해 구원 받고 싶다는 지나친 열망이 새로이 찾아온 작은 기회를 시시해보이도록 만들고, 모든 것을 뻔하다고 여기는 시니컬함이 새로운 계기 속에 깃든 작은 구원을 한낱 뽑기 인형처럼 보이게 만든다. 


봄은 혁명이다. 극적인 전환의 시기다. 뿌리부터 모든 것을 바꿔 놓는다. 모든 죽어 있던 것들을 살아나게 만든다. 그러한 봄은 아마도 다시 오지 않는다. 우리는 그 계절 이후를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어떤 계절을 지나고 있든, 이 또한 삶이다. 우리는 이 계절에 어울리는 사랑을 또한 할 수 있다. 구원의 갈망을 버리고, 뻔하다는 절망감을 내려놓고, 우리가 우리를 스스로 가둔 펜스 속에서 걸어 나와 본다면 말이다. 우리 앞의 계절이 여름일지, 가을일지, 겨울일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우리는 에베레스트 산 입구의 마을까지는 걸어가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 모르지.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서 사람들을 기다리던 '진짜 사랑-삶'이 너무 심심한 나머지 마을 입구의 커피가게에 내려와 있을지도 말이다.


영원한 탈출은 없다. 무엇인가로부터 탈출하고자 생각할 때 우리는 이미 우리가 만든 펜스 속에 갇혀버린다.


끝으로 이런 상상을 해본다. 사토시를 위해 홈런을 친 시라이와는 홈런 기념 여행을 떠난다. 당연히 에베레스트 산 입구에 있는 마을이다. 그곳의 작은 커피가게에서 두 사람은 하품을 하고 있는 진짜 사랑을 만난다. 사토시가 말한다. 


"난 진짜 사랑이란 게 이렇게 금방 점심 식사를 마친 하마처럼 하품이나 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어딘가 분한 기분이 든 진짜 사랑이 답한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들이야말로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서 100년 쯤 살다가 와보라고."


시라이와와 사토시가 정색을 한 채 손사레를 치며, 이 글은 끝이 난다. 



2017. 6. 28.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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