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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진 May 15. 2018

협녀, 칼의 기억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박흥식 <협녀, 칼의 기억>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초딩 무렵 나에게는 간절한 바람이 하나 있었다. 평지에서 훌쩍 뛰어올라 아파트 2층 베란다에 착지하는 것이었다. 당시 무협 스타였던 성룡이나, 이연걸 등은 아파트 3층까지 뛰어오를 수 있다는 게 정설이었으니, 나름 합리적인 목표를 세운 것이었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동네 뒷산에 올라 모래 주머니를 양 발목에 묶고 점프 연습을 수도 없이 했었다. 그러나 짐작하겠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아파트 2층까지 뛰어오르는 것은 무리다. 대신, 어린 날의 그 숲속의 수련 덕분에 농구 경기에서 점프볼을 잡아내는 주특기가 생겼으니 어찌 됐든 원대한 꿈을 심어준 성룡과 이연걸에게 감사할 일이다.  


이렇게 무리한 꿈을 꾼 건 아니다


어린 내가 무림 고수가 되길 바랐던 것처럼, 우리는 누구나 간절히 바라는 것이 하나씩 있다. 그리고 그 바람이 우리를 숨쉬게 한다. 살아가게 한다. 어떤 사람은 사랑을 바라고, 어떤 사람은 부와 권력을 바라며, 다른 어떤 사람은 세상이 정의로워지기를 바란다. 박흥식 감독의 <협녀, 칼의 기억>은 사랑과 권세, 정의를 바랐던 세 사람에게 쥐어진 칼에 대한 이야기다.  


고려의 무신정권은 1170년 이의방의 집권부터 1270년 임유무의 실각까지 100년 동안 지속되었다. 초대 집권자였던 무신 이의방 곁에는 천민 출신의 무사 이의민이 있었다. 이의민은 왕조시대를 통틀어 가장 밑바닥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뛰어오른 남자였다. 이연걸 식으로 셈하면 평지에서 제2 롯데월드 122층까지 뛰어오른 것이다. 이의민은 최상층 123층까지 단 한 층을 남긴 상태에서 숙청 당했다.  


<협녀, 칼의 기억>은 아마도 이 역사의 한 장면을 잘라내어 그 안에 인생의 고민을 심는다. 만약, 이의민에게 사랑하는 이가 있었다면, 이의민이 그를 배신하고 권세에 눈이 멀었다면, 그리고 그 탐욕을 다스리려는 또다른 이가 있었다면. 이 세 가지 가정이 영화를 움직인다.  


 

배우들은 각기 한 자루 마음의 칼이 되었다


이 영화는 무협 영화가 아니다. 박흥식 감독은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인어공주>, <해어화> 등 멜로를 기반으로 사람 사이의 드라마를 풀어내는 감독이다. 많은 평론가들이 오직 이 영화를 무협물이란 장르적 시각에서 분석하려 했기에 이 영화가 지닌 가치를 충분히 발견하지 못했다.  


<협녀, 칼의 기억>은 아름답다. 자연의 풍광, 고려의 궁과 거리, 아라비아의 상인들과 무역이 활발했던 당대의 공간들을 상상력을 통해 복원하고 있다. 소품과 인테리어 하나하나가 정성스럽고 근사하다. 전도연과 김고은, 이병헌이 펼치는 무술 연기는 손에 땀을 쥐게 하지는 않는다. 대단한 긴박감이 생기지도 않는다. 그러나 몹시 아름답다. 칼끝을 향하는 배우들의 살아있는 시선과 몸의 선들을 그림으로 간직하고 싶어진다. 이 영화의 배우들은 그 스스로가 한 자루의 칼이다. 설랑을 연기한 전도연은 사랑을 품은 칼, 홍이를 맡은 김고은은 정의를 향한 칼, 덕기역의 이병헌은 권세를 탐하는 칼이다. 마치 칼을 갈듯이 세 사람은 각자의 마음을 날카롭게 갈고 또 간다. 


세밀하게 표현된 공간


무술 연기는 손에 땀을 쥐게 하지는 않는다.
대단한 긴박감이 생기지도 않는다.
그러나 몹시 아름답다. 


이 정도로 아름답다면 차라리 손에 땀이 나지 않는 편이 좋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내가 톨스토이의 이 유명한 책 제목을 청소년 권장도서 목록에서 처음 보았을 때는 이미 아파트 베란다 2층까지의 점프를 포기했을 때였다. 나는 형광등 불빛이 끔벅거리는 낡은 구립도서관 서가에서 오래된 소설책들을 찾아 읽고 있었다. 그때 나는 새로운 간절함을 마음에 품었었다.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고. 그로부터 20년 정도가 흘렀을까. <협녀, 칼의 기억>의 마지막 장면을 보며 나는 다시 오래전의 그 순간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묻게 되었다. 아,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2018. 3. 20. 멀고느린구름.



“그렇게 좋으셨다지  

엄마는 네 아버지 웃는 얼굴이 

얼마나 천진한 웃음이던지 

엄마는 그 얼굴이 꽃보다 좋았지 

그렇게도 좋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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