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지앵 인테리어 17
지난 시간에 만든 근사한 물망초 책장으로 인해 내 삶은 한층 더 풍요로워졌다. 푸른 새벽의 어스름빛 속에 자연스레 섞여 있는 책들을 보면 저절로 영감이 솟아나곤 했고, 응접실에 들어서면 저절로 서가로 발걸음이 이어져 사두고는 읽지 않았던 책들도 여러권 클리어할 수 있었다. 인테리어의 힘이다.
가끔 왜 그렇게 애써서 집을 꾸미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 나는 그때그때 떠오는대로 대답을 하곤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유는 하나다. ‘나’를 지키고 사랑하기 위해서다. 내가 머무는 공간은 결국 나의 시간을 담은 채, 내가 애정하는 것들을 품으며 나의 공간다워지기 마련이다. 즉, 집이란 나를 확장시켜 표현한 또 하나의 나다.
내가 사랑하는 것, 내가 꿈꾸는 것을 집 곳곳에 부여함으로써 나는 ‘꿈꾸는 나’를 잃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직장에서 퇴근한 후에 엔틱 스타일의 소파에 앉아, 푸른 벽과, 한 면 가득 꽂혀진 책을 바라보고 있으면 월급을 받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직장인이 아니라, 내 속에 머무는 작가로서 비로소 존재할 수 있게 된다. 나 혼자 먹는 커피라도 정성스레 내려서 유서 깊은 커피잔에 담아, 카모메식당 풍의 주방에 앉아 홀짝이면 내가 틀리지 않게 살아가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내가 만든 파리지앵 인테리어는 결국 다시 내게로 돌아와 나를 파리지앵으로 만들어준 것이다.
물망초 책장의 완성으로 연남동에서의 내 기나긴 인테리어 여정도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망초 책장을 가득 채우고도 자리가 없어 떠돌던 책을 적절히 배치한 후, 이제 내게 남은 인테리어 공간은 미루고 미뤄오던 욕실뿐이었다.
근사한 붙박이 책장을 만들었으나, 내 소장도서의 양은 가뿐히 책장의 수용량을 넘어서고 말았다. 결국, 수백 권의 책을 위한 여러 가지 깨알 수납공간을 확보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번 화에서는 애서가들을 위한 깨알 수납공간과 책을 아름답게 진열하는 나만의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 깨알 수납 1
‘알코브’는 벽기둥과 기둥 사이에 움푹 꺼져 들어간 부분을 칭하는 용어다. 유럽식 인테리어 잡지를 보면 꼭 보이는 이 공간을 나는 무척 부러워 했었다. 그곳에 선반만 고정해 놓으면 곧바로 멋진 책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의 월세방에 그런 공간이 있을리가 없다. 나는 발상을 바꿔봤다. 벽과 벽 사이에 움푹 들어가는 게 아니라, 불쑥 튀어나오는 ‘역알코브’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케아에서 저렴하게 구입한 기둥형 공간 책장이 그 일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 깨알 수납 2 * 지난 주방편에서 잠시 소개
우리나라 독립서점의 성지격인 ‘유어마인드’에 들를 때마다, 그 아름다운 서가에 늘 경탄하고는 했다. 삼각 지붕의 천정까지 닿은 거대한 원목 책장은 집의 구조상 도무지 흉내낼 수 없는 것이었지만, 입구를 들어서면 곧 마주하는 직사각형의 나무 서가대는 꼭 흉내내보리라 여겼었다. 마침, 새로운 식탁을 구입하며 이전에 쓰던 식탁이 서가대로 안성맞춤이었다. 곧바로 개조해버렸다.
| 깨알 수납 3
기존 책장을 분리해 책장을 만들고 난 후 기존 책장에 쓰였던 목재들이 잔뜩 남았다. 이 녀석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궁리하던 중 커피테이블 겸 책장을 만들면 일석이조가 아닐까 싶었다. 곧 톱과 전동드라이버를 들고 작업에 나섰고, 그럴싸한 커피테이블 책장을 만들었다.
| 책 진열법
책을 아름답게 진열하기 위해서는 역시 높이를 맞추는 게 첫째, 색을 맞추는 게 둘째일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애서가라면 먼저 장르순, 작가순 등을 따를 테니 좀처럼 높이와 색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애서가로서의 자부심과 아마추어 인테리어 디자이너로서의 자존심도 지키고 싶었던 나는 아래와 같은 순서에 따라 책을 진열했다.
A. 문학 코너와 비문학 코너를 나눈다. - 문학 코너는 한국 소설, 외국 소설, 시, 에세이로 장르 구분 - 비문학 코너는 도서분류체계에 따라 철학 / 역사 / 정치사회 / 교육 / 경제 등등으로 구분.
B. a와 같이 나눈 상태에서 특별히 콜렉션을 만들고 싶은 작가나 시리즈 도서, 전집류 등에게 별도 공간을 다시 부여한다.
C. b까지 마무리한 상태에서 체계가 무너지지 않는 선까지 모든 책의 높이와 색을 최대로 맞춘다.
D. 특히 책등이 아름다운 책이나 색 배합이 좋은 시리즈는 따로 빼서 깨알 수납 공간의 단독 책장에 진열한다.
E. 책등이 흉하거나, 다시 읽지 않을 듯한 책, 서류 뭉치 등은 차라리 속지가 보이도록 진열한다.
2018. 7. 20. 멀고느린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