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설들

비가 오면 좋겠어 (上)

단편소설

by 장명진


"비가 올 것 같은 날씨로군. 비가 오면 좋겠어."


집을 나설 때 분명 하늘에는 먹구름이 개지 않은 이불처럼 깔려 있었다. 별빛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사선으로 뚝 잘려나간 달 주변으로 짙은 달무리가 드리워져 있었다. 볼을 스치는 바람이 제법 포근하고 근사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막 4일 간의 유행성 독감에서 벗어나려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한 겨울용 캐시미어 목도리를 단단히 두르고 있었다. 지난 번 지방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노점에서 무려 70% 세일하는 것을 산 것이었다. 장사꾼들은 모두 이미 겨울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당연하다. 이제 겨울을 준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 봄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봄은 분명 국경 밖의 어딘가에서 한 열 번째 줄 정도에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런 인상착의를 하고 말이다.


내가 고열로 시달리는 동안 쾅쾅, 지지지지, 두두두두 하는 별 괴상한 소리를 내며 내부 공사를 해대던 옆집은 어느 새 그럴싸한 게스트하우스로 변모해 있었다. 모든 게 내가 투병 중이어서 동사무소에 민원을 넣지 않은 덕분인 줄 알아라. 하고 한 마디 해두었다. 새 게스트하우스는 답이 없었다. 자기도 처음 보는 이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게 물론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세 사람 정도가 교차해서 지나다닐 수 있는 좁은 골목을 내려가면 사거리가 나왔다. 어느 쪽으로 가든 수 갈래의 골목으로 나뉘게 되어 있는 동네다. 내가 자랑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그 골목들의 연결로를 머릿 속에 똑똑히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종종 관광안내소 같은 곳에서 받은 알록달록 일러스트 지도를 들고 미로를 탐방하는 이방인들을 보면, 짐짓 고위 관료가 된 것 같은 우쭐한 기분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아마도 평생 고위 관료 같은 것은 되어 보지 못할 천운을 타고 난 것 같으니 그런 호사 정도는 누려도 좋다고 생각한다.


문득, 떠올려 보니 오랜만의 밤 산책이었다. 그 사이 골목들이 참 많이도 변해 있었다. 빨간색이었던 건물이 까만색이 되어 있는가 하면, 3층이던 것이 4층으로, 두 개의 건물이었던 것이 하나의 건물로 합쳐져 있었다. 대개 일반 주택이었던 것이 상업 시설 등으로 바뀐 것이어서, 기기묘묘한 이름의 간판들이 작명대회를 펼치고 있었다. ‘그라나다 알함브라’에서부터 ‘순정’까지라고 하면 그 스펙트럼이 짐작이 될런지. 만약, 그 사이 어딘가에 내 가게의 간판을 걸어 둘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면 뭐라고 지을지 걸으면서 생각해보기로 했다. 우선은 간판보다는 가게부터 있어야 하는 게 원칙이겠지만. 그러나 구태여 따지고 보면 가게가 없는 간판 보다 간판이 없는 가게가 더 무의미하지 않은가.


미로를 빠져 나와 기사 식당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차도를 건너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공원길로 접어들었다. 내가 이 동네로 이사 올 무렵에는 그저 폐 철길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고 그 주변으로 잡초가 잔뜩 돋아난 버려진 황무지에 지나지 않았던 곳이다. 재작년 즈음 한 1년 간 우당탕탕하더니 거짓말처럼 거대한 원시림 같은 공원이 만들어져버렸다. 모르긴 몰라도 저 하늘 어디에선가 신이 뒷머리를 긁적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놈들이 이렇게까지 해버리면 참 곤란한데 하면서. 신에게는 곤란해도 나에게는 무척 훌륭한 서비스였다. 단지 방세가 싼 곳을 찾아 이사를 했을 뿐인데, 몇 년 사이 갑자기 이토록 쾌적한 공원이 생겨주었으니 말이다. 사실, 나는 이 공원이 생기기 이전에도 몰래 태초의 황무지 속에 뛰어 들어와 마음대로 걸어다니곤 했었으나, 아무래도 황무지 보다는 공원 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 들어서 한가한 산책의 시간을 방해 받는 것이 아닌가 우려했는데, 막상 만들어지고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공원 길이 너무 길어서 원래 내가 산책을 즐기던 쪽으로는 사람들이 거의 넘어 오지도 않는 것이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거의 이 공원은 내 개인의 편의를 위해 하늘이 점지해준 것과 다름 없었다. 아, 하늘의 신은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지. 아무렴 누가 준 것이든 그저 감사.


공원 숲 길의 정상 궤도에 올라 약간의 물기가 어린 근사한 바람을 맞으며 앞으로 걸었다. 왠지 아득해져서 저절로 눈이 감겼다. 숲에서 나는 향기가 달달했다. 공원의 한 블럭을 지나 다음 블럭으로 넘어가는 경계에 있는 2차선 차도에서 차를 먼저 보내고 있었다. 차들도 약간 졸린 듯 느릿느릿 공원의 허리를 타고 건너편으로 넘어 갔다. 차들을 다 보내고 으쌰 하면서 길을 건너려고 하는 차에 오른 편 어둠 속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여-'

"여어-"


나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작년에 인근으로 이사를 온 친구였다. 친구와 나는 대학 동기로 한때는 온갖 허물과 심금을 털어놓고 나누던 사이였다. 그 한때라는 것이 어느 때였나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할 정도로 친구와 나는 최근 별다른 교류가 없었다. 친구가 이사를 온 후 만난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이 정도가 되면 사실 그 친구를 친구라고 부르는 것조차 이상하지만, 친구라고 부르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은 전혀 없었다. 아무튼 우리는 친구였기에 ‘여-‘라는 친구다운 말로 인사를 나눴다. 그 정도면 할 도리를 다했다고 우리는 동시에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짧은 인사를 나눈 후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각자의 갈 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고맙게도 우리 앞에는 두 갈래 길이 있었다. 나는 왼쪽으로 친구는 오른쪽으로 걸었다. 두 길 사이의 거리는 약 10미터 정도 이격되어 있었기에 서로 신경을 쓰지 않고 걸으면 얼마든지 각자의 자유로운 공기를 호흡하며 걸을 수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했다. 그런 면에서 굉장히 공통의 정서가 있었다.


문제는 걷는 속도였다. 내가 걷는 평균 속도는 아무런 가방이나 짐을 들지 않은 남자 - 단, 이 남자의 고교 100m 기록은 15초 이내여야 한다 - 가 무빙워크 위에서 하품따위를 하지 않고 걷는 속도와 비슷했다. 공교롭게도 친구의 속도도 그와 비슷했다. 내가 기억하기로 친구의 고교 100m 기록은 13초 안 쪽이었다. 내가 하드웨어 면에서 유리한 점이 분명 있었지만, 친구는 소프트웨어로 그 부분을 충분히 커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속도를 좀 더 올려 볼까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어쩐지 볼썽 사나운 한밤의 경보 대회 같은 것이 연출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굳이 내 뒤에 오는 제3자에게 힘차게 씰룩거리는 엉덩이를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것은 애초에 내가 집을 나와 모처럼 산책에 나선 동기와도 전혀 부합하지 않는 것이었다.


‘참 곤란하군’이라고 생각하는 와중에 더욱 곤란한 상황이 닥쳐오고 있었다. 갈림길이 하나로 합쳐지는 구간이 몇 십 미터 앞에 보이는 것이었다. 대책을 준비할 틈도 없이 나와 친구는 결국 그 대통합로에서 정확히 재회하고 말았다.


"오-"

"오오-"


대체 나와 친구가 내뱉은 이 ‘오’라는 한 음절을 뭐라고 지칭해야할지 아직 잘 모르겠다. 신음, 괴성, 비명, 탄식, 한숨, 감탄…. 모르겠다.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신이 이제 그만 정신을 차리고 정답을 알려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냥 같이 걸어보기로 했다. 물론 어느 쪽에서도 그런 합의를 한 적은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먼저 말을 걸어온 쪽은 친구 쪽이다.


“그러고보면 예전에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지?”

“그랬지 분명. 기숙사 뒤의 산책로였나. 내가 걷고 있었는데, 그때도 갑자기 너가 나타났지.”

“아냐, 반대야. 내가 걷고 있었는데, 니가 나타났지.”

“그랬던가?”

“그랬어.”

“그랬나?”

“어.”

“음….”


나는 팔짱을 끼고는 곰곰이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분명히 내가 먼저였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하고 하나 둘 떠올려 보니 친구와 기숙사 뒤의 산책로를 걸었던 일이 하도 많아서 ‘예전에 이런 비슷한 일이’라고 했던 것이 대체 어느 시점을 말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떤 날은 내가, 어떤 날은 친구가 먼저 산책로를 걷고 있었던 것이다. 우선 친구의 얘기를 끝까지 들어보고 진실을 명명백백하게 밝혀내리라 마음 먹었다.


“그때 우리가 아마 달리기 시합을 했었지.”


친구가 말했다.


“자전거 경주가 아니고?”


내가 답했다.


“스케이트 보드였던가?”


친구도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되물었다.


“스케이트 보드는 타 본 적이 없네만….”


내 대답을 들은 친구는 곧 다시 결론을 내려 말했다.


“그럼 달리기네.”

“자전거는?”


나는 왠지 억울한 듯이 물었다.


“자전거가 맞나?”


친구도 이 부분에서는 약간 자신이 없는 것 같았다. 우리는 달리기를 한 뒤에 자전거를 탄 것으로 잠정 합의를 했다. 사실은 자전거를 탄 후에 달리기를 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정말로 스케이트 보드를 탔었거나. 왜냐하면 나는 예전에 아버지에게 내가 어렸을 적부터 맥주병이었다고, 바다에서 자랐는데 왜 이렇게 수영을 못하느냐고 항의를 했다가 말도 안 되는 사진을 목격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사진 속의 나는 여섯, 일곱 살 무렵의 꼬맹이였는데 튜브도 없이 유유자적 바다 위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다. 그 뒤로 나는 인간은 결코 자신의 기억에 대해 오만한 태도를 지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달리기를 한 뒤에 자전거를 탄 것으로 기억을 합의하고 나니, 마치 국가 정상들의 합의문처럼 효력이 발생됐다. 머릿 속에 그 날의 상황이 묘하게 선명히 그려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보다 구술을 통한 서술 능력이 뛰어난 친구가 그날의 상황을 천천히 풀어내기 시작했다.






“내가 기숙사 산책로를 걷고 있을 때 니가 갑자기 나타났지. 야외공연장 쪽에서 말이야. 그때만 해도 아직 거기에 야외 공연장이 있었어. 기억나? 거기에서 신입생 입학식이 열렸지. 그때도 우리는 같이 서있었군 그러고 보니. 아무튼, 넌 그쪽에서 왔어. 넌 자연스럽게 내 행보에 동참했고, 우리는 나란히 걷기 시작했어. 달빛이 밝은 밤이었어. 달무리를 보고 우리 중에 누군가가 내일은 비가 올 것 같다고 했지. 그 말이 신호탄이 되었어. 갑자기 네가, 그래 아니야. 우리 둘 중 누군가가 거의 동시에 라고 하자. 누구라고 특정할 수 없이 우리들은 잘못 딴 와인병처럼 어딘가를 향해 쌩 날아가기 시작했지. 물론 우리가 그때 무공술을 익혔다는 건 아니고. (나는 이 대목에서 조금 웃고 말았다.) 사실은 달리기를 시작한 거지. 우리는 비가 쏟아지는 도로를 질주하는 마라토너처럼 한 밤의 산간 도로를 달렸어. 과학도서관 입구 정도가 되어서야 그 달리기는 끝이 났지. 그리고 누가 먼저 말했나. 이건 나라고 해두자. 내가 말했어. 걔랑 헤어졌어. 라고. 그런데 우습게도… 아, 이제 우습게도 라고 말해도 괜찮은 거겠지? 너도 이렇게 말했지. 뭐야, 나도 헤어졌다. 라고. 우리는 하나도 좋을 게 없는데 웃었어. 숨은 헐떡이고, 땀이 줄줄 흐르는 가운데 말이야. 그리고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이공계 캠퍼스의 비탈을 내려갔지. 이상했어. 마치 모든 일이 해결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거든. 정말로 비가 쏴아 하고 시원하게 내릴 것 같았어. 하지만 다음 날 비는 오지 않았고, 우리는 똑같이 괴로워하며 살았지. 다시 이렇게 풀어 보니 정말 이상한 이야기야.”


친구는 가까스로 긴 이야기를 마쳤다.


“정말 이상한 이야기네. 누가 들으면 늑대인간이 보름달을 보고 발광한 정도의 이야기로 들리겠어.”


나는 촌평을 그렇게만 덧붙였다. 우리는 한 동안 말없이 그날 밤을 떠올리며 걸었다. 아마도 확신하건데 그때 헤어졌던 여자친구가 누구였는지 곰곰이 되짚어 보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기억한다. 친구도 기억할 것이다. 다만 우리 중 누구도 그 여자친구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그들의 삶과 우리의 삶이 벌써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 속으로 멀어져버렸음을. 우리는 같은 시공 속을 살아가는 게 아니라 저마다의 평행시공 속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건 나와 친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나?”


친구가 물었다. 그런 질문을 할 친구가 아닌데 이상했다.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서 답했다.


“요즘은 따분하게 지내지.”

“그렇군….”


묘하게 말줄임표가 길게 늘어져 있는 응답이었다. 하는 수 없이 되물었다.


“너는?”

“음… 쓸데없이 살고 있지.”

“아아….”


그리고 우리는 또 말이 없었다. 따분하게 지내는 인간과 쓸데없이 사는 인간이 나란히 걷고 있다. 우리는 이제 공원을 완전히 벗어나 응답하라 1988에 응답하고 있는 마을의 골목들 사이를 아무렇게나 지나고 있었다. 아래로 향한 가로등에서 떨어져 나온 주홍빛 불빛들이 길 여기저기에 물들어 있었다. 나는 문득 골목길의 좁은 담벼락 사이로 줄자처럼 보이는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달의 반쪽이 보였다. 반쪽 달 주변으로 개나리색이 수채 물감처럼 번져 있었다. 집에서 나올 때보다 더 번져 있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되기도 하나 하고 반문을 해봤지만 답을 알려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 역시 답을 듣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다. 골목길의 미로 속을 빠져 나오자 친구가 말을 꺼냈다.


“미로를 탈출했군.”


나는 딱히 답하지 않았다. 우리 앞에는 곧 중앙 가로수길을 기준으로 삼아 양쪽으로 두 개의 길이 쭉 뻗어 있는 보행용 대로가 펼쳐졌다. 가로수길에는 당대의 유행 품종인 벚나무가 한 70% 정도를 차지하고 있어서, 바람이 툭 지날 때마다 연분홍빛 꽃눈이 하나 둘 사르락 떨어져내렸다.


“4월의 눈이라고 하는 영화가 있어. 일본 영화지. 혹시 본 적 있어?”


친구가 물었다. 본 적이 있다. 츠마부키 사토시 주연의 영화로 메이지 시대 가문 어른들의 장난으로 맺어지지 못하는 여자와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영화다. 시종일관 비극적인 분위기를 처연한 색과 음악, 그리고 벚꽃으로 지탱해가는 작품이었던 것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마지막에 여자가 비구니가 되잖아. 난 가끔 그런 결말을 생각해봐. 그때 남자의 정성에 탄복해서 결국 여자와 만나는 거지. 그리고 두 사람은 마지막 하룻밤을 보내게 되는 거야.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그러지 않는 게 역시 좋았다는 생각이 들더군.”


친구가 말했다. 나는 의아한 톤으로 되물었다.


“왜지?”


친구는 짐짓 슬픈 표정으로 답했다.


“서로가 서로를 더듬을 때 여자의 대머리를 더듬게 되지 않겠어. 그리고 그날은 불발로 끝나고 말겠지….”

“아….”


나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나 디시 한 번 생각해보면 꼭 그렇게 되리란 법은 없다. 여자가 대머리이건 아니건 사랑의 행위를 치를 수 있는 남자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육체의 사랑이란 것도 어디까지 정신의 영역, 그러니까 좀더 엄밀하게 따지자면 뇌의 활동이기 때문에 시각적인 이질감 같은 것은 노력 여하에 따라, 혹은 다른 강렬한 감각이 시각을 지배하는 방법을 통해 충분히 극복이 가능할 수 있다. 나는 이 말을 친구에게 꼭 전해주고 싶었다. 그때는 말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


친구가 빠르게 밑밥을 던졌다.


“무슨 생각?”


내가 물었다.


“인생이란 건 어쩌면 정말 말도 안 되게 사소한 이유로 가장 중요한 것들을 놓치게 만든다고 말이야.”

“그건 그렇군.”


정말로 그건 그랬다. 친구는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사실 난 최근에 직장을 그만뒀어. 이유는 이런 거야. 여느 때처럼 착실하게 5분 정도 일찍 회사에 도착했지. 여느 때처럼 나 이외의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 도착해 있었어. 물론 어디에든 만년 지각생이 한 두 명은 항상 있기 마련이어서 한 두 자리는 비어 있었지. 나는 늘 지각하지 않았는데 지각을 했다는 죄책감 속에서 하루를 시작해. 그날도 마찬가지였지. 대체 왜 저 사람들은 회사에 5분보다 더 빨리 출근하는가 하는 의문과 욕설을 그날도 마음에 떠올렸어. 사내 메일함에는 상사의 업무 명령 세 개가 도착해 있었고, 나는 휴게실에서 커피 한 잔을 타 가지고 와서 일을 시작했어. 자리에 앉아 몇 줄의 보고서 문장을 쓰고 커피를 마시려고 종이컵을 들다가 우연히 안을 들여다 봤는데 말야. 종이컵 속에 날파리가 한 마리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거야. 도대체 그녀석이 무슨 목적으로 거기에 들어가서 살려달라고 허우적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지. 날파리의 입장에서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일 거야. 우리 중 누구도 어쩌다가 거기에 자신이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는 거지. 누가 모종의 음모에 의해 우리를 집어다가 뜨거운 커피 속에 떨어뜨렸다고 생각해야만 차라리 분명해지는 그런 상황이었지. 난 종이컵을 내려놨어. 그리고는 날파리가 그 속에서 죽어가는 걸 냉정하게 바라봤지. 화장실에 달려가 커피를 쏟아버리면 날파리를 구할 수 있었을까? 아마 그렇게 해도 날파리는 죽었을 거야. 나도 거기까지 상상을 한 뒤 차라리 포기하고 최후의 순간을 지켜봐주는 쪽을 선택했던 거야. 날파리는 곧 죽어버렸어. 어쩐지 나는 참을 수 없이 비참한 심정을 느꼈어. 정말 참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회사를 그만 둔 거야.”


나는 날파리 이야기와 결론 사이에 놓인 한강의 넓이를 계산하느라 한동안 대꾸하지 못했다.


“으음… 그랬군. 그럴 수 있지….”


나는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는데도 이상하게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이 말은 대체 내 뇌 속의 어느 부분이 지시를 한 걸까. 친구의 말에 생존의 위협을 느꼈다면 파충류의 뇌 영역일 것이고, 감정의 공명을 일으켰다면 변연계 시스템일 것이며, 한강의 넓이를 무의식적으로 계산하는데 성공했다면 신피질 영역의 한 부분일 것이다. 헌데 말이란 놀랍다. 친구의 이야기에 공감을 표하는 듯한 말을 해놓고 보니, 기묘하게 가슴에 겨울바다 같은 차가운 물이 차오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 물이 너무도 차가워서 나는 울 뻔했다.


“날파리는 정말 뜨거웠겠어. 얼마나 뜨거웠을까….”


나는 또 그렇게 말해버리고 말았다. 친구가 답했다.


“날파리의 명복을 함께 빌어주자구….”

“그럽시다.”


우리는 갑자기 우르르 밀려온 밤바람에 눈보라처럼 흩날리는 벚꽃잎을 앞에 두고 잠시 눈을 감아 날파리의 명복을 빌었다. 분명 아무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는데, 눈을 감았던 그 잠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우리는 대로를 나와 도로변을 따라 식당과 상가들이 밀집해 있는 연희동 쪽으로 걸었다.


- (下)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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