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들 <우주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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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쇠사슬 그네가 있던 놀이터 뒷편에는 170 센티미터 정도의 담벼락이 있었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썩 기쁜 일이 아니었던 나는 늘 그 놀이터의 흙바닥 위에 노을이 어릴 때까지 머물렀다. 주로 혼자서 몇 시간이고 그네를 탔다. 그네를 삐걱거리며 앉아 있으면 오고가는 아이들이 전하는 온갖 괴담을 들을 수 있었다. 그중 가장 마음을 끄는 것은 그네에 관한 괴담이었다. 놀이터 뒷편의 담벼락 너머에는 아찔한 낭떠러지가 있는데, 몇 년 전 여자아이 하나가 그네를 타다가 그만 뒤로 날아가서 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나눈 아이들은 조심스럽게 그네를 타거나, 아예 그네 근처로 오지 않았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거의 180도 각도로 그네를 씽씽 타고는 했다. 들어보지는 못했지만 분명 나에 대한 괴담도 생겨났으리라. 가령, 그 죽은 여자아이의 귀신에 씌인 아이 하나가 매일 놀이터에 와서 그네를 씽씽 탄다는 등의 괴담. 사실은 절반쯤은 진실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정말 소름끼칠 정도로 그네를 오래, 열심히 탔으니까. 나조차도 왜 그네를 타야만 하는지, 어째서 그네에 앉아 있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지 알 수가 없었으나, 나는 자발적으로 그네 귀신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네가 아래로 포물선을 그리며 나를 담벼락 쪽으로 쭉 당길 때면, 종종 손을 놓아버리고 싶었다. 나 또한 여자아이처럼 담벼락 뒤의 세계로, 낭떠러지 아래로 날아가보고 싶었다. 몇 번인가 잠시 손을 떼어본 적이 있지만 곧 대야로 얼음물을 끼얹은 것 같은 서늘함을 느끼고, 그네의 쇠사슬을 움켜쥐곤 했다. 꿈 속의 나는 용감하게 손을 놓아버리고, 창백한 허공 속으로 던져지곤 했다. 꿈이면서도 생생한 감각을 느꼈다. 책에서 읽은 ‘진공’이란 공간의 느낌은 분명 그런 것일 거라고 여겼다. 그네로부터 던져져 창백한 허공을 부유하는 순간은 이상할 만큼 길고 길었다. 백지 위에 오직 나만이 그려져 있었다. 나만이 색깔을 지니고 있었다. 숨을 쉬고, 눈을 깜박이며 존재하는 것은 오직 나밖에 없는 시공. 백지는 무한히 뒤로, 아래로, 확장이 되어 있어서 날아가고 있는 나의 운동성을 증명할 수가 없다. 나는 언제나 백지 위의 한 점으로만 무한히 표기되어 있을 뿐이다. 진공의 백지 속에서 나는 늘 외친다. 낭떠러지는 어디에 있는가. 낭떠러지는 어디에 있는가. 여자아이는 어디로 떨어진 건가.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고 나는 점점 거대해지는 무한한 백지 속에 한 점이 되어가다 잠에서 깼다.
멋대로 조퇴를 한 날이 있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있을 시간이라 놀이터는 텅 비어 있었다. 죽고자 할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1교시에 들은 터라 내게는 미약한 용기가 있었다. 놀이터 곳곳에 흩어진 커다란 바위들을 모아 돌탑을 쌓고, 발돋움을 하여 가까스로 그네 뒤의 담벼락을 올랐다. 담벼락 위에 걸터 앉아 너머를 내려다보았다. 낭떠러지가 아니었다. 실망스러웠다. 그래도 가파른 비탈이 70미터 정도 길이로 이어져 있었고, 어린아이가 그네에서 뒤로 던져졌다면 충분히 데굴데굴 구르다가 죽음에 이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비탈의 너비는 딱 놀이터의 크기 만큼이었다. 초등학생 아이가 전력 질주 달리기 시합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너비라고 할까. 음침한 그늘 속에서도 무성한 잡초가 자라 있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각종 곤충들도 서식하고 있을 게 틀림 없어서, 걸음을 옮기기 조심스러웠다. 나는 무언가를 밟아 죽일까봐 불안해하며 천천히 천천히 비탈의 아래쪽으로 발을 내딛었다. 당연히 여자아이의 시체 또는 죽음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두어번 미끄러져 넘어진 뒤에 나는 비탈의 최하단에 이를 수 있었다. 그곳에는 엉뚱한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종종 멋대로 조퇴를 하거나, 놀이터가 비어 있는 시간을 기다려 담벼락을 수시로 넘어야 했다. 처음에는 큰 바위를 나르고,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다시 바위를 치우는 일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점차 바위 없이도 담벼락을 넘을 수 있게 되었고, 사건을 해결하는 것도 날이 더해질 수록 능숙해졌다. 학교 아이들이 먹다가 남은 음식들을 자청해서 수거하며 ‘거지새끼’라는 별명을 덤으로 얻은 것은 불행 축에 끼지도 않았다. 어차피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았고, 내 쪽에서도 아무에게도 마음을 기울이지 않았다. 담벼락을 넘은 뒤부터 내 진정한 삶은 오직 담벼락 뒤의 세계에만 존재했다. 담벼락 앞의 세계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2019. 10. 9. 멀고느린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