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터 한트케 <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
세계적인 게임 스타 마리오는 머리로 들이 받으면 버섯이 튀어나오는 벽돌이 있는 세계에 살았다. 그 벽돌은 마치 공중부양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랍비처럼 공중에 떠있었다. 뿅뿅뿅뿅 하는 소리와 함께 벽돌 속에서 솟아나는 버섯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발을 지니고 있어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마리오가 재빨리 그 버섯의 뒤를 좇아 버섯과 포개어 지면(나는 결코 복용이라고 쓰지 않겠다.) 마리오는 슈퍼 마리오로 변했다. 슈퍼 마리오는 일반 마리오에 비해 몸집이 약 2배 정도 커졌고, 공중 벽돌을 함부로 부수고 다닐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된다.
페터 한트케의 장편소설 『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를 읽으며 슈퍼 마리오를 떠올린 것은 이 소설의 주인공인 탁스함의 약사, 혹은 운전기사가 버섯에 심취한 인물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허나 다른 이유를 무언가 대보라고 한다면 사실 더 할 말이 없기는 하다. 설정상 미국의 배관공인 마리오와 흰 약사 가운에 어울리는 구리빛 피부를 지닌 약사가 서로 닮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금발 머리에 핑크색 드레스를 즐겨 입는 피치 공주와 주인공을 두들겨 패는 것으로 애정을 표시한 ‘승리자’ 사이에 일말의 공통점도 찾을 수 없다는 데에 이르면 애초에 내가 왜 슈퍼 마리오로 이 글을 시작했을까 난감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시작된 글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낙태 되지 않고 탄생한 모든 생명에게 우리는 무한한 책임을 지녀야 하듯이 말이다. 사실, 슈퍼 마리오를 언급한 것은 이 글을 서평으로 기대하고 읽기 시작한 사람의 뒤통수에 일격을 가하기 위해서다. 탁스함의 약사가 공항 뒤편의 숲에서 알 수 없는 누군가로부터 일격을 당하고 난 뒤 모험을 시작한 것처럼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모르는 사이에 이미 모험은 시작됐다.
우리는 우리가 전혀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 태어났다.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일정한 속도로 도로를 달려가는 자동차에 탑승한다. 운전기사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어디론가 실어나른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하는지는 운전기사도 몸도 마음도 사실은 잘 모르고 있지만, 가끔은 알고 있다. 바로 그 ‘가끔’에 힘 입어 우리는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옮겨진다. 마리오에게 닥친 운명도 비슷하다. 마리오는 갑자기 스테이지에 던져진다. 기묘하게도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무한히 점프와 질주를 반복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슈퍼 마리오가 되었다가, 다시 일반 마리오로 돌아왔다가 하는 것을 지겹게 되풀이 하다 보면 어느새 스테이지의 마지막에 도달한다.
게임 ‘슈퍼 마리오’를 플레이하는 사람은 당연히 게임 밖에 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태어난 우리를 자동차에 싣고 달려가는 운전기사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여기까지 쓴 다음, 커피 원두 콩을 글라인더에 넣고 갈기 시작했다. 어두운 밤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애석하게도 잘츠부르크 시에 인접한 탁스함이나 탁스함의 약사가 반드시 그렇게 표기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던 “스탭 지역”은 아니다. 이곳은 서울시 한강을 앞에 두고 있으며, 젊은 예술가들이 밀집해 모여 살고 있는 동네다. 이곳에서 유명한 약사라고 하면 현정 약국의 노약사를 들 수 있겠다. 이 분과의 대화는 항상 다음과 같은 식으로 이루어졌다.
“감기에 걸린 것 같아서요.”
“음... 목이 좀 아프고, 약간 어지러울 정도로 현기증이 있고, 열이 좀 나죠? 기침은 심한 편이고.”
“아... 네. 맞습니다. 정말 정확하시네요.”
단순히 흔한 감기 증세를 짐작으로 맞추는 거라고 폄하하면 곤란하다. 이 노약사는 적어도 내가 아는 한 무좀과 복통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세밀한 진단을 할 수 있었다. (한편, 나에게 무좀이 있다고 여기는 것도 곤란하다.)
드립용으로 갈아진 원두에 뜨거운 물을 부어 커피를 내렸다. 이 커피를 미리 데운 잔에 담아 한 모금 마시며 나는 방금 전의 노약사와 슈퍼 마리오 게임을 함께 즐기는 장면을 상상해버리고 말았다. 어쩌면 이 모든 허튼 생각들이 나에게 ‘블루 마운틴’ 원두가 없어서 생겨난 게 아닐까 싶었다. 서러웠다. 블루 마운틴은 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분명히 지리산과는 전혀 다를 것이었다. 나는 여지껏 살아 오며 아직도 ‘블루 마운틴’을 보지 못했고, 마셔 보지도 못했다. 아주 오래전 언젠가 단 한 번, 블루 마운틴을 마셔 볼 기회를 가진 일이 있었다. 그녀와 만나기로 한 카페가 블루 마운틴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카페였던 것이다. 그 카페의 이름은 무려 ‘카프카’였다. 나는 카프카 앞에 서 그녀를 오래 기다렸다. 허나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고 나는 결국 쓸쓸히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 뒤로 블루 마운틴을 마셔볼 기회는 갖지 못했다.
그런 것이 어디 블루 마운틴뿐일까. 아마도 그래서 종종 사람들은 어두운 밤 적막한 집을 나서게 되는 것이다. 혹은 말을 멈추고 먼 나라의 책을 펼쳐들게 되는 것이다.
2015. 11. 10. 멀고느린구름.
<Axt> 3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