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설들

우주의 의미 9

소설 <우주의 의미>

by 장명진

9


당신은 깊어지는 이국의 밤 속에서 길을 잃은 채 히치하이킹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내 시야를 가리던 거대한 트레일러 차량이 팔을 흔드는 당신을 쏜살 같이 지나쳐 가자, 당신은 다음 차량을 향해서는 팔을 들지 않았습니다. 우주의 신이 당신을 만나게 하려던 것이었을까요. 나는 정말 나도 모르게 차를 세웠습니다. 이미 당신이 있던 곳을 50미터 가량 지나친 다음이었지만, 백미러 속에서 당신이 뛰어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몸집만한 주황색 캐리어 가방을 끌고 다가오고, 나는 운전석 문을 열고 내렸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국적이 같음을 확인한 뒤 어색하게 웃었습니다. 당신은 캐리어를 트렁크에 넣고, 뒷좌석에 앉았고, 나는 다시 운전을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번화한 곳이면 어디든 좋다고 했습니다. 아르바트 거리면 괜찮겠냐고 물었고, 당신은 괜찮다고 했습니다. 더 이상은 서로 아무 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도착한 아르바트 거리에는 불 꺼진 상점들만 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트렁크에서 캐리어를 힙겹게 꺼내는 당신의 표정도 다시 칠흑 속의 히치하이커처럼 굳어 있었습니다. 잠시 고민했지만 나 역시 더는 친절을 베풀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트렁크 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거리의 잠을 깨우기는 커녕 어두운 침묵의 무게를 더 실감케 했습니다. 운전석 문을 열기 전에 문득 밤하늘을 올려다 봤는데, 별이 가득했습니다. 일순간, 살아온 인생이 고속도로의 가로등들처럼 빠르게 스쳐갔습니다. 그런 일은 또 처음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분명히 그랬습니다. 그때 당신이 제게 말했습니다. 혹시 집이 있으신가요? 라고.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마치 명령 같았습니다. 그날까지 나를 살게 했던 모든 것이 내게 내린 명령 같았습니다. 있어요. 내 짧은 대답이 오히려 당신에게 신뢰를 주었던 것 같습니다. 당신은 이번에는 큰 캐리어를 품에 안은 채 뒷좌석에 앉았습니다. 당신과 나는 그날 밤 처음 만나, 내가 머물던 숙소로 향했습니다.



오래된 유럽식 아파트의 가장 꼭대기, 나선형의 계단을 다섯 번 맴돌아야 하는 곳에 내 방 501호가 있었습니다. 당신의 캐리어는 무척 무거웠습니다. 그점은 꼭 밝혀두고 싶습니다. 당신은 황동 열쇠를 넣어 문을 여는 내 모습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주시했습니다. 내 방에는 별 다른 물건이 없었기 때문에 정돈된 것처럼 보일 수 있었습니다. 나는 소파에서 잘 테니, 당신은 침대에서 자도 좋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이 아이는 뭔가요. 당신은 침대 배게 오른 편에 손수건을 덮고 잠들어 있는 별이를 발견하고 물었습니다. 고양입니다. 라고만 답하고, 서둘러 별이를 소파로 옮겼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욕실에 들어가 세안을 하고, 손을 씻으며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수연이의 어떤 면도 닮지 않았습니다. 우주는 어째서 그런 당신을 그날 밤에 만나게 한 것일까요.



당신과 내가 각자의 잠자리에 누워 불을 끈 시각은 새벽 1시 즈음이었습니다. 잠이 올리 없었습니다. 당신과 나는 각자의 사연에 빠져 있으면서도, 하나의 강물 속에 발끝을 담그고 있었습니다. 그 강물은 겨울의 강이라기보다는 봄의 강물이었습니다. 개나리와 진달래, 연푸른 새싹들, 간지러운 바람, 새 공책을 가방에 넣고 등교하는 아이들을 연상케 하는 물결이었습니다. 은하수를 보신 적 있으세요? 당신이 물었습니다. 캄캄한 방 속에서 당신의 목소리만이 별빛처럼 선명했습니다.



2019. 11. 2.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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