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읽기
박원순 시장이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비서를 상대로 4년간 성추행을 자행했다는 혐의를 남겨둔 채. 그의 명예롭지 못한 죽음을 두고 세상이 어지럽다. 고인에 대한 예를 다해야 한다는 사람들과 피해자와 연대하고 진상을 밝혀야 한다는 사람들 사이에 거친 말들이 오가고 있다.
나는 박원순 시장을 좋아했다.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지 못해도 해야 할 일들을 차근차근해나가며, 수도 서울을 대안적 도시로 만들어가는 모습을 응원했다. 정적들에게 거친 비난을 받을 때도 나서서 비호하고는 했었다. 이 사람이 서울이 아닌, 국가 전체를 디자인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가끔했다. 이제는 모두 옛일이 되어버렸다.
愼終追遠, 民德歸厚矣 신종추원, 민덕귀후의
삶의 마감을 신중히 하고 먼 조상까지 추모하면, 백성의 덕이 후하게 될 것이다.
논어 학이편 제9장에 있는 공자 학단의 메시지다. 동양의 상례와 제례는 모두 이 한 구절에 기원을 두고 있다. 내 글 ‘우리는 왜 제사를 지내는가’에서 ‘신종추원’ 중 ‘추원(追遠)’ 관한 이야기를 풀어본 적이 있다. 오늘은 ‘신종(愼終)’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공자는 죽음에 대해 신중해야 한다고 했다. 신중하다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게 마음을 다해 행동한다는 것이다. 고대의 인간은 생명이 다한 사람에 대해 무심했다. 시체를 죽은 장소에 그대로 내버려두는 일도 흔했고, 마을 어귀에 대충 쌓아놓거나, 짐승들 사이에 던져두기도 했다. 공자는 이런 일을 금하고, 한 존재가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 대해 존중을 표해야, 자신이 죽었을 때도 후대의 사람들이 같은 존중을 표하리라 보았다.
여러 논란 속에서 박원순 시장이 가장 신중한 마감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어디에도 알리지 않은 채 가족들과 특별한 지인들끼리 조용한 장례를 치르는 것이 고인을 가장 평화로이 보내는 방법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관계자들은 가장 화려한 방법을 선택했고, 그 선택은 마치 야생의 들판 위에 고인을 던져놓는 것과 마찬가지 선택이었다. 삶의 마감에 신중함이 부족했다.
고인의 공헌에 대한 사적 추모와 피해자에 대한 공적 연대는 상호 모순되는 일이 아니다. 장례기간 동안 조용한 애도를 표하고, 곧 진실의 편에 서려고 한 사람들도 많았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거창한 장례와 미디어의 보도경쟁이 사람들의 마음을 온통 뒤섞어버렸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는 장례 방법을 선택한 이들에게 1차적 불찰이 있다.
불명예스런 죽음의 상황과는 별개로 거창한 장례가 진행되자 고인에 대한 몇몇 과잉 애도가 성추행 피해자를 지워버리는 대대적 공세의 양상을 띠면서, 2차 가해가 점입가경으로 확산되었다. 어딘가 한 주체는 강한 브레이크를 걸 필요가 있었다. 정의당이 그 역할을 맡았다. 장혜영, 류호정, 심상정 세 의원이 고인에 대한 애도와 함께 피해자에 대한 연대 의사를 밝혔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언론과 대중은 세 의원의 애도에는 주목하지 않고, 피해자에 대한 연대 메시지만을 문제 삼았다. 전형적인 편가르기식 해석이다.
박원순 시장의 장례가 조용히 가족장으로 치러졌다면, 아마도 나 역시 애도의 시간 중 어느 하루는 아무도 모르게 그의 공적을 기억하며 잠시 묵념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눈 앞에서 자행되는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보면서 그럴 마음의 공백조차 가질 수 없었다. 나는 피해자 곁에 먼저 서고, 성추행 혐의와 관련된 모든 의혹이 마무리 된 후에야 조용히 박원순 시장의 공적을 반추하자고 마음 먹었다.
고인에게는 영원한 추모의 시간이 있지만, 살아있는 피해자에게 연대할 수 있는 시간은 오직 지금뿐이다. 박원순 시장이 성추행범이었다는 사실이 확정되어도, 그가 남긴 역사의 다른 공적들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고인을 위한다는 사람들이 그의 의혹을 억지로 덮으려고 하면 할수록 고인은 더 추한 사람이 되고, 끝내 아무도 그를 객관적으로 기억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약자를 지키고자 할 때, 법의 판결이 이루어진 후에야, 모든 진실이 낱낱이 밝혀진 뒤에야 약자의 편에 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진실과 거짓이 뒤섞여 있기 마련이니, 우리는 누구나 조금은 틀리고, 조금은 맞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혼자 힘으로 밝히긴 어려운 어둠과 싸우는 사람 곁에서 작은 촛불들을 보태온 것이다. 바로, 정의를 위해 연대해온 것이다.
고인에게는 영원한 추모의 시간이 있지만,
살아있는 피해자에게 연대할 수 있는 시간은 오직 지금뿐이다
다른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서울시민으로 살며 고인에게 많은 빚을 졌다. 그에게 못다한 예를 다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진실을 정의롭게 밝혀내야 한다. 큰 잘못이 있었다면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기록되어야만 한다. 피해자의 삶이 온전히 회복되고, 진실의 바탕 위에서 그에 대한 용서를 결정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우리 중 누구도 피해자를 대신하여 그를 용서할 수는 없다.
나는 아직 박원순 시장을 추모하지 않겠다. 그러나 진실이 밝혀지고, 피해자가 고인을 용서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언제라도 고인의 무덤가에 찾아가 고개를 숙이겠다. 너무나 원망스럽고 실망스럽지만 고마운 일이 많았다고 말하겠다. 그날이 모쪼록 하루라도 빨리 오기를 바란다. 그날까지 피해자의 편에서 굳건히 연대하겠다. 나는 고인의 옛 삶을 통해 그렇게 배웠다.
2020. 7. 15. 멀고느린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