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하루의 이야기
명절이 다가오면 우울감도 함께 밀려들기 시작한다. 올해는 더 유난했던 것 같다. 내 마음에 그늘이 지기 시작한 것이 벌써 몇 주 전부터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정신없이 일하던 시절에는 지나쳤던 해묵은 감정들과 회한들이 매일매일 새롭게 내 앞을 서성여서 어느 녀석부터 상대를 해야 할지 순번조차 정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이벤트들은 어딘가 한쪽 모서리가 일그러진 것들이었다.
내게는 즐거웠던 명절의 기억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아주 어렸던 시절에는 제법 신나는 일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 아스라한 유년의 추억 말고, 선명하게 기억나는 일들은 대부분 불편하고, 불쾌한 일들 뿐이다. 내가 중학교 1학년일 때 내 가족은 완전히 해체되고 말았으니, 가족 기반의 행사가 유쾌할 리가 없는 것이다. 명절의 가장 큰 의미는 역시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돌아갈 집이 없는 이들에게 명절은 근원적으로 무의미한 일이다.
벌써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추석이었던가, 연인의 집에 초대된 적이 있었다. 연인의 가족들은 지방으로 떠났고, 나와 연인만 빈집에 남아 함께 명절을 보냈다. 근처 마트에서 장을 봐서 저녁을 만들어 먹고, 루미큐브를 했다. 그때 루미큐브는 내게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임이 되었다. 늘 저주처럼 여겨졌던 명절에 행복하다는 기분을 느낀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 덕분에 해마다 명절이 드리우는 그늘이 깊어질 때면, 자동으로 그날의 장면들이 떠오른다. 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작용 반작용의 법칙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명절은 유난히 길고, 공허했다. 늘 마시던 맥주 말고, 다른 제품에 도전해보고자 명절 첫날에 한 캔 마셨던 맥주가 부작용을 일으켜 명절 내내 두통과 숙취에 시달리고 말았다. 정신 차리고 보니 시간이 다 가버렸다. 술로 고통을 잊을 수 있다는 사람들이 부럽다. 내게는 결국 맨 정신으로 이겨내는 길뿐이다. 우울한 마음도 지쳐가고 있다. 그다음은 무엇일까. 내 생명력은 지독히 끈질긴 편이니, 아마도 다시 빛이 있는 곳으로 기어가리라. 아주 오랜만에 쓴 이 글이 그 더딘 행진의 전주곡쯤은 되겠지. 그러면 안녕, 우울군. 다음에 또 봅시다.
2022. 9. 13. 멀고느린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