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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진 Nov 30. 2022

백지 위에 매일매일

어느 하루의 이야기


이달 초부터 새 장편소설 집필을 시작했다. 내게 장편소설을 쓰는 일은 나라는 자아를 버리고, 소설 속 인물의 자아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일이다. 그래서 장편을 쓸 때는 그 외의 글을 쓰기가 평소보다 어렵다. 마침, 며칠 째 소설의 물줄기가 흐르지 못하고 있어 오랜만에 넋두리를 늘어놓을 수 있게 되었다.


한참 정신없이 직장생활을 할 때부터 여유가 생기면 꼭 써야지 다짐했던 아이템이 4개 있었다. 하나는 과거에 썼던 SF소설의 리메이크, 하나는 생계 위기로 연재를 중단해야 했던 우리 신화를 다룬 판타지 소설, 하나는 동학혁명의 과정을 그리는 가상역사소설, 마지막 하나가 지금 쓰고 있는 ‘속죄’에 관한 소설이다. 장편소설 집필은 보통 1년에서 2년이 걸리는 큰 프로젝트다. 내 영혼과 뇌를 빅데이터로 만들어 인공지능에 이식할 수 있다면 네 작품 동시 집필이 가능하겠지만 아직 불가능한 일이라 하나를 택해야 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쓰고 싶은 작품을 선택했다.


옛날처럼 매일 조금씩 웹 공간에 연재를 하며 쓸 수 있으면 나도 좋고, 독자들도 좋겠지만 우리나라의 기형적인 문단 시스템 탓에 그럴 수가 없다. 조회수가 10이 나오더라도 누군가에게 공개된 소설은 공모전이나 기고, 출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덕분에 20대 후반, 30대 초반에 쓴 나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을 작품들은 아직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그래서 애초부터 개인 출판사에서 낼 각오가 된 작품이 아니면 공개 연재가 어렵다. 고독과 마주하며 묵묵히 써내려가는 수밖에.


직장에 취직하며 폐업 신고를 할 수밖에 없었던 내 개인 출판사 ‘페이퍼클라우드’의 문을 내년 1월부터 다시 열 계획이다. 20년 넘게 소설을 써왔는데 내세울 책이 없는 것이 늘 민망했기에, 2023년 첫 책은 소설이 담긴 책을 내고 싶다. 그 책에 담길 글은 웹 공간에 먼저 공개할 생각인데, 아마도 커피를 주제로 한 내용이 될 것이다.


퇴사 후, 열심히라면 열심히 브런치에 글을 써봤는데, 글을 쓸 때마다 구독자 수가 오히려 줄어들어서^^; 의욕이 많이 꺾이고 말았다. 브런치 탄생 이전, 티스토리에 글을 연재할 때는 꾸준히 반응을 보여주는 독자분들도 계셨고, 평균 조회수도 사실 브런치보다 높았다. 세월이 흐르는 사이 웹 공간의 독자 유형도 많이 달라져서 이제 티스토리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옛 영광(?)은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내 글과 브런치의 상성도 초창기에만 좋았지, 지금은 굉장히 이질적인 느낌이다. 모 정치인의 팬덤에 의해 공중폭파된 내 트위터 계정도 1년이 되도록 살아나지 않고 있다. 디아스포라의 삶이다. 익숙하게 살던 국가에서 추방된 난민이 된 기분으로 요즘을 살아가고 있다.


다시 뿌리를 내린다면 이제는 웹 공간이 아닌, 생생한 현실에 뿌리내리고 싶다. 땀이 만든 돈으로 기꺼이 책을 사고, 시간을 내어 읽어주는 사람들은 전파 속이 아닌, 대지 위에 있었다. 잊혀지고, 사라져버릴 0과 1의 전자 부호가 아닌 존재하는 물질로서의 ‘책’을 꾸준히 생산하는 사람이 이제는 되고 싶다. 가상이 아닌 지상에서의 새 봄을 위해 이 한겨울의 고독 따위는 힘껏 물리쳐야지. 백지 위에 매일매일 지금의 나를 씨앗처럼 꼭꼭 새겨 넣으며.


2022. 11. 30.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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