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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진 Jul 02. 2024

반추

어느 하루의 이야기


‘반추反芻’라는 제목의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늘 반추하는 인간이다. 지나간 일들 속으로 몇 번이고 돌아가 생각한다. 지나쳐온 장소들로 떠나고, 지나간 인연들과 홀로 마주한다. 너무 과거에 사로 잡혀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 같아서 그런 내가 싫었던 적이 있다. 억지로 반추하는 것을 멈춰 본 적도 있다. 미래가 오기는커녕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아니 텅 빈 것 같은 날들이 이어졌다.


시간이라는 게 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어렴풋이 이해하고 나니, 내가 과거를 돌이켜 생각한다고 여겼던 일들의 의미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었다.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직선의 시간이 허상이라면, 과거를 보는 것이 곧 미래를 보는 것이고, 미래를 보는 것이 과거에 얽매이는 일일 수도 있게 된다. 시간이 없는 세상에서 반추하는 인간은 미래를 되새기는 인간일 수도 있는 것이다.


시작에서 끝으로 향하는 시간이 없다면, 우리는 전적으로 물질의 속성에 의거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모든 물질은 회전한다. 확률의 구름 속에서 비슷한 경로로 무한히 반복되는 춤을 추며 돌고 돈다. 그렇다면 반추하는 인간은 정말로 미래를 보는 인간이 될 수 있다. 내가 지나쳐온 경로를 언젠가 한 번은 비슷하게 다시 지나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을 제법 살아 보니, 과연 삶은 재즈의 변주와 비슷하다. 나라는 테마가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어딘가 닮은 자기 복제의 연주가 반복된다. 세션들이 바뀌지만, 어딘가 몇 년 전에 만났던 멤버들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일도, 사랑도, 기적까지도 비슷한 패턴으로 돌아온다. 완전히 똑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기에, 처음엔 ‘내게 이런 일이?’라고 놀라다가도, 다시 강물이 흐르고 되돌아보면 ‘아, 이 일은 그때 그 일과 닮았군’이라고 정리가 되는 것이다.


30대 초반에 수년 동안의 긴 연애공백기를 가졌던 적이 있다. 결국, 내 삶의 끝은 고독사일 것 같아서 마흔이 되면 태평양을 건너는 유람선을 타고 바다로 떠나서 영영 이 세계로 돌아오지 말자는 생각을 했었다. 운명의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아, 기적은 또 있을까? 내가 지금 다시 비슷한 궤적을 돌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은하의 중력에 끌려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별들의 무리 속에 들어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곧 비가 쏟아질 것처럼 여름 새벽하늘은 울먹인다. 그래서 ‘반추’라는 제목의 소설은 언제 쓸 것인지.


2024. 7. 2. 장명진.




*별 관련 없는 내 책 홍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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