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시시콜콜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명진 Jul 14. 2024

작고 파란 폴로 셔츠

어느 하루의 이야기


그이가 선물로 보낸 셔츠가 도착했을 때, 나는 곧바로 셔츠의 사이즈를 확인했다. 100. 나는 보기보다 키가 있어서 110을 입는다고 그이에게 여러 번 말했던 기억. 그이가 내게 처음 선물한 셔츠는 타미힐피거 브랜드의 그레이색 셔츠였다. 그 셔츠 역시 100 사이즈여서 자주 입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거의 입지 못했다. 그레이색 타미에 대해서는 한 가지 사연이 더 있다. 선물 받은 그 옷을 처음으로 입고 그이와 데이트했던 날, 우리는 헤어졌던 것이다. 반쯤 사귀기로 한 뒤, 첫 번째 데이트 날이었다. 그날의 트라우마로 그레이색 타미 셔츠는 주로 내 옷장의 가장 어두운 곳에 머물게 되었다. 이따금 옷장 문을 열 때, 타미 그레이가 아직 존재하고 있는지 확인을 한다. 장자의 나비꿈처럼 나도 어쩌면 타미 그레이의 꿈을 꾸었던 것인지도 모를 일 아닌가. 하지만 겹겹의 옷들을 몇 번 헤쳐 보면 어김없이 타미 그레이는 그곳에 있다. 그는 세월이 지날수록 오그라들고 있는 것 같아서, 이제는 애써 입으려고 해도 단추가 잠기지 않을 듯하다.


그이가 보낸 ‘작고 파란 폴로 셔츠‘는 타미 그레이의 기구한 사연이 리빙 레전드로 건재한 상황에서 내게 왔다. 타미 그레이 이후, 거의 10년 만이었다. 사이즈 100의 랄프 로렌 폴로 브랜드 셔츠는 아주 진한 파란색이었다. 공교롭게도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는 암묵적으로 파란색 옷을 입어서는 아니 되는 곳이었다. 내가 파란색을 좋아한다는 걸 기억해 준 것만은 고마웠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내 현실과 맞지 않아 곤란했다. 그래도 그이가 애써 이 선물을 골랐을 정성을 생각해, 한 번은 작고 파란 폴로 셔츠를 입고 회사에 나갔다. 하루 종일 놀림감이 되고 말아서, 나는 셔츠 로고의 폴로맨처럼 조그만 인간이 되어 퇴근했다. 그 뒤로 겨우 두어 번 입었다. 사이즈가 너무 작아서 여름에 입으면 답답하고, 겨울에 입기에는 색이 너무 쨍했다. 그이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늘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파란 폴로는 타미 그레이의 어두운 섬에 함께 기거하게 되었다.


작고 파란 폴로 셔츠를 선물 받은 후로, 그이와는 연락이 뜸해졌다. 1년에 한 번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내는 정도로. 그이가 내 축하 메시지에 답을 하지 않은 다음부터는 내 쪽에서도 힘껏 연락하지 않고 있다. 무언가 커다란 다툼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인생의 강물이 그러한 방향으로 흘렀다. 공교롭게도 그이가 보낸 틀린 사이즈의 셔츠들은 우리 관계의 마지막 장을 장식했다. 나는 그이를 십수 년, 아니 이제는 수십 년이라고 해야 할 시간 동안 그리워했다. 그리워하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이를 떠올리면 나는 피천득의 <인연> 속 글귀가 생각난다. 나는 반평생 그이를 그리워하면서도, 단 한 번 그립다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이는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줄 잘 모르겠다는 말을 했다. 그때 나는 내 인생 전체를 부정당한 기분이 들었다. 더 이상 그이를 그리워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달이 기울면 바다가 움직이듯, 마음은 붙들어 둘 방법 없이 흐른다. 이제는 흐르는 대로 내버려 두고 만다. 그저 마음이 끌리는 대로 가지 않을 나이가 되어서 그럴 수 있는 것 같다.


지금도 옷장 속 어두운 섬에 함께 있을 타미 그레이와 파란 폴로에게. 나의 베스트 셔츠를 다섯 장 꼽으라면 그중 두 장은 너희의 차지라고 말해주고 싶다. 무언가를 사랑하는 방법이 영 엉터리인 것 같지만, 어떤 마음은 엉터리여서 영영 변하지 않는 것이다. 올여름이 가기 전에 한 번 파란 폴로를 입고 종로를 산책해야겠다. 아니다. 역시 그건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다. 가을에 입을까. 언제나 망설이다가 인생은 지나가고 만다.


2024. 7. 14. 장명진.




* 별 관련 없는 내 책 홍보


매거진의 이전글 반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