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하루의 이야기
‘진. 삼국무쌍’이라는 게임이 있다. 이 게임은 플레이어가 전장에서 밀려드는 수천수만의 적군을 마치 여포처럼 혈혈단신으로 격파해나가는 게임이다. 단순한 버튼 조작으로도 세계관 최강자가 되어 문자 그대로 적을 날려버릴 수가 있어서, 게이머들 사이에는 본격 양학(양민학살) 게임으로도 불린다.
지나온 내 인생은 무쌍 게임을 반쯤 닮았다. 끝도 없이 수천수만의 적군이 내게 달려든다는 점에서 말이다. 기왕 닮으려면 버튼 하나로 수십 개의 골칫거리를 날려버릴 수 있는 것까지 닮으면 좋았을 텐데 싶다. 삶에서 움츠러드는 일이 생길 때면 거대 스케일의 게임에 몰두하게 된다. 핍박받는 소국가의 독립을 성취하거나, 지구를 파괴하려는 외계인에게 맞서다 보면, 직장 스트레스는 사소한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제 아무리 높은 삶의 파도라도 네까짓 것 한 판 붙어보자는 자세를 갖게 되는 순기능 덕에 나는 여전히 종종 게임을 즐긴다.
글은 이렇게 썼지만, 삶이 게임만큼이나 만만할 수가 없다. 만약 내가 낙천적이면서도 도전적인 성정을 타고나지 않았다면, 벌써 중학생 때 인생에서 게임아웃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중학생 시절 나는 이른바 전따를 당했는데, 별 괴로움도 느끼지 못하고 그 상황 자체를 꽤 시시하게 여겼다. 당시 나는 자신을 어른스럽다고 여겼던 것 같으나, 진짜 어른이 된 지금 생각하면 어린아이가 궁지에 몰려 강력한 자기방어막을 친 거였다. 그 시절 나는 ‘파이어엠블렘’이라고 하는 아주 하드한 난이도의 SRPG 게임을 즐겼는데, 침략당한 왕국을 되찾고, 흑막인 암흑룡을 물리치는 긴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었다. 암흑룡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나인데, 중딩들의 철없는 짓거리 정도야….
비록 나는 그렇게 고난의 터널을 돌파했으나, 같은 터널 속에 있던 다른 아이들은 그 터널 속에 그대로 갇히고 말았다. 시야가 좁았던 어린 시절의 나는 나 자신밖에 생각하지 못해서 비슷한 처지의 친구를 돕지 못했다. 두고두고 후회하는 일이다.
리즈라고 할 수 있는 고등학생 시절을 제외하고는 모든 순간에 고난은 내 가까이 머물렀다. 쉽게 흘려보낸 해가 거의 없어서 나는 마치 100년의 세월을 살아온 것 같은 느낌이다. 아니, 거의 죽었다 깨어나기를 여러 번 해서 인생 다회차를 사는 느낌도 든다.
본래 나는 눈에 쌍꺼풀이 없는 무쌍인데, 지난달에 오른쪽 눈에 생긴 쌍꺼풀이 한 달 가까이 사라지지 않고 머물렀다. 처음에는 느끼해 보여서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익숙해지니 괜찮았다. 어쩐지 티비에 나오는 재벌집 막내자식이 된 것 같기도 해서 으쓱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무쌍 인생이 마감하면, 지겨운 인생 무쌍도 마감하지 않을까 엉뚱한 기대도 걸어보았었다.
하지만 엊그제 나는 다시 무쌍이 되었다. 지겹다 지겨워. 앞의 문장이 오늘 새벽 내가 쓴 문장 중에 가장 진솔한 문장이다. 익숙한 얼굴을 마주하니, 지난 한 달 잠시 다른 존재가 되었다가 나로 돌아온 듯하다. 솔직히, 알면 알수록 ‘나’라는 건 없다. 모든 존재와 현상은 아득한 우주의 영원한 진동이 지구별의 어느 한 점에서 순간적으로 일으키는 작용의 한 불꽃에 지나지 않는다. 잠시 모였다가 흩어지고 마는 것들을 기억의 그물로 붙들어 ‘나’라는 폴더에 저장해두고 있을 뿐이다. 고독이란 사람의 무의식이 감지하는 우주적 허무의 감각이다. 우리는 어째서 외로운가. 삶이 본질적으로 허무한 탓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토록 무한의 적군이 밀려드는 무쌍의 인생을 헤쳐나가려 할까. 헤쳐나가야 할까. 이다음에는 그렇지 않은 삶이 기다리고 있어서? 아니다. 이다음에도 비슷한 유형의 고난을 또 겪을 것이 틀림없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기 위해서?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이라는 것도 상상의 표현일 따름이다. 모두 이미 지나간 것에 대해 사후적으로 우리는 ‘기쁨’이니, ‘슬픔’이니 하는 평가를 내리고 감각하는 것이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이, 다만 영원한 흔들림 속에 우리는 머물고 있다. 이 흔들림은 때로는 춤이 되어 우리를 웃게 하고, 때로는 고문이 되어 우리를 울게 한다.
생각 속으로 너무 빠져들어가면 움직일 수가 없다. 인생을 정의하고 내 손에 붙잡아 두려고 하면, 인생은 홀연히 흩어진다. 그럼에도 내가 지금 듣고 있는 키스 자렛의 ‘에브리 타임, 위 세이 굿바이’는 사무치도록 아름답다. 이 세계에 아름다움이 없었더라면 진정 나는 살지 못했으리라.
아, 오른쪽 눈에 머물렀던 쌍꺼풀은 꽤 아름다웠는데… 이렇게 또 지나고 나서야 아쉬워한다. 칠흑의 어둠 속에서 까닭 없이 반짝이는 수억의 별들처럼, 삶은 고난 속에서 잠깐씩의 아름다움을 꽃피우기 위해 존재한다. 고 요즘 나는 생각한다.
2025. 12. 19. 멀고느린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