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설들

안녕, 구름들 5

여자친구의 여자친구

by 장명진

세상에 진실은 없다. 없다고 여긴다. 무엇이 진실한 마음이고 무엇이 진실하지 않은 마음인지 누구도 판결할 수 없다. 무심. 수계를 받는다면 무심으로 하자고 잠시 생각한다.


여자친구의 얼굴이 어느 정도 보이기 시작한다. 스트레이트 파마로 어깨까지 길게 내린 검은 머리카락. 쌍꺼풀이 없는 옆으로 긴 눈. 옅은 눈썹과 작은 코. 햇살에 부딪혀 더 하얗게 보이는 피부. 여자친구다. 여자친구는 특별히 아름답지도 않고 유난히 못나지도 않다. 그런데 어떻게 나는 수 많은 사람 속에서도 여자친구가 여자친구인 것을 아는 걸까. 아니 잠깐. 알고 있나? 다시 여자친구를 본다. 아니다. 여자친구가 아니다. 여자친구는 어디로 갔나. 목을 빼고 여자친구를 찾아본다. 어디에도 없다. 휴대폰을 본다. 수신 문자도 없다. 눈 앞으로 커다란 구름 조각이 지난다. 우윳빛 셀로판지를 댄 것처럼 세상이 뿌옇게 보인다. 구름이 내 이마와 코와 눈을 쓰다듬고 지난다. 불현듯 외롭다고 느낀다. 내가 지금 어느 시간 속에 있는지 모호하다. 나는 청년인가. 노인인가. 내가 생각하는가. 내가 생각되어지는가. 서늘한 바람이 새어 들어온다. 카페 문이 열린 것이다. 여자친구가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는다. 아마도 나와 약속을 했으니 나일 것이다. 어쩐지 숨고 싶어진다. 여자친구는 오래 나를 찾지 못한다. 못할 것이다. 못했으면 한다. 못하지 않는다. 여자친구가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든다. 나도 멋쩍게 손을 들어 보인다. 여자친구가 옆에 와 앉는다. 의자를 빼어 주는 것을 깜빡한다. 의도적이지도 안 의도적이지도 않다.


여자친구는 웃기도 하고 웃지 않기도 하며 이야기를 한다. 어제 마트에서 공짜로 얻은 체크무늬 종이가방의 아름다움, 여덟 살 무렵 잃어버렸던 보물에 관한 것- 그것이 어떤 물건이었는지 알 수 없다.- 내가 깜박 집에 두고 온 커플링 반지의 역사. 한 번쯤 여행을 가보고 싶은 나라. 바가지를 씌우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모 인터넷 쇼핑몰. 여자친구는 마치 오늘 이 시간을 위해 이만큼 이야기를 수집해 왔어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처럼 끊이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간다. 나는 여자친구의 이야기를 따라 이 공간에서 저 공간으로, 저 시간에서 이 시간으로 정신없이 시공간 여행을 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따위는 가볍게 비웃어 주며.


여자친구의 이야기를 나는 듣고 있다. 아니 어쩌면 듣지 않고 있다. 들으려 하는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 여자친구가 나에게 무언가를 전달하고 싶을 수도, 혹은 그게 아닐 수도 있는 것처럼. 사실 여자친구는 종이가방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의 이야기이다. 아니 종이가방의 이야기다. 모든 이야기는 그것들의 이야기이지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없었다. 나의 구름과 여자친구의 구름이, 여자친구의 여자친구의 구름이 다르듯이.


여자친구가 시공을 넘나드는 이야기를 이어가는 동안 나는 지붕을 쓰다듬고 지나는 구름들을 수도 없이 본다. 몰려든 구름들은 어디로도 떠나지 못하고 남아 층층 안개가 된다. 안개 너머에서 여자친구의 목소리를 듣는다. "영국에 갈 거야." 그 목소리는 비현실적으로 또렷해서 마치 안개 스스로가 이야기하는 것 같다. 안개는 말한다. 안개의 도시로 가고 싶다고. 그것은 흡사 고향에 가고 싶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나는 갑자기 여자친구의 고향이 궁금해져 묻는다. " 넌 고향이 어디야." 여자친구가, 혹은 안개가 대답한다. "어디에도 없어 그런 건." 나는 나의 고향을 떠올려 보려 하지만 쉬이 떠오르지 않는다. 여자친구는 말을 멈춘다. 커피 잔 속을 멍하니 들여다본다. 그 속에 조각 달이라도 빠져있다는 듯이. 침묵이 시작되자 구름의 영상이 사라진다. 여자친구가 걷히고 안개가 나타난다. 아니 안개가 걷히고 여자친구가 나타난다. "매일 매일 비가 왔으면 좋겠어." 여자친구가 말한다. "왜?" "매일 매일 우는 건 힘들잖아." "그건 그렇지." 나는 여자친구의 말에 공감한다. 고 생각한다. 안개처럼 무상하던 여자친구의 이야기는 이제 빗방울이 된다. 한 방울 떨어졌다가 정적. 또 한 방울 떨어졌다가 정적. 을 반복한다. 분명 나는 여자친구의 이야기에 흠뻑 젖어 있지만 그것이 어떠한 감각인지 분명히 느끼지는 못한다. 그저 젖어 있다고 느낄 뿐. 안개의 이야기도, 빗방울의 이야기도 우리의 이야기가 되지 못하고 흩어진다.


우리는 이야기를 다 마치지 못하고 카페를 나온다. 여자친구는 커피를 반만 마신다. 그 속에 든 조각 달을 헤치지 않으려고. 아마도. 거리의 밤하늘에는 달이 없다. 당연하다. 달은 조각나서 여자친구의 커피 잔 속에 빠져 있으니까. 나는 왜 집요하게 이 관념을 끌고 나가려는 걸까. 애초에 달은 어디에도 없다. 는 것을 안다. 고 생각한다.


거리를 거닐며 우리가 손을 잡았는지 잡지 않았는지 모호하다. 어느 순간은 손바닥을 휘감고 지나는 밤바람을 느꼈고, 어느 때는 여자친구의 온도를 느낀다. 우리가 손을 잡고 있다면 그것은 왼손인가 오른손인가. 알 필요가 있는가. 이 문단은 이 글에서 의미가 없으므로 삭제.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안녕, 구름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