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친구의 여자친구
남부터미널 역으로 내려갈 수 있는 지하도 통로 우측 위 50미터 지점에 나무로 된 벤치가 있다. 우리는 그곳에 앉는다. 지금이 아니라 10분 전에. 10분 간 우리는 아무 말이 없고, 어디도 바라보지 않는다. 그저 인생은 그렇다는 듯이 시간이 지나가도록 내버려둔다. "언제 가니." "글쎄, 아빠가 죽은 날... 이미 난 영국으로 떠난 것 같아." 여자친구는 여기에 없다. 어쩌면 난 여자친구의 환영을 기다리고, 그 환영과 이야기하고, 환영과 여기에 나란히 앉아 있는지도 모른다. "밤 공기가 차다..." 밤 공기가 따뜻했지만 나는 그렇게 말한다. "사랑이 뭘까." 여자친구가 묻는다. 나를 비롯해 우주의 그 무엇도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허공에 흩어지는 언어를 붙잡으려는 듯이 여자친구가 다시 묻는다.
"날 사랑하니?"
무심한 구름들이 몰려와 붉고 푸른 지붕들을 쓰다듬고 지나기 시작한다. 거대한 구름들이다. 이제껏 보지 못한. 여자친구의 모습이 구름에 덮인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여자친구의 여자친구가 걸어나온다. 나는 여자친구의 여자친구를 사랑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은가. 사랑'했다'고 말하면 좀 더 옳은가. 옳지 않다. 세계는 모호한 것 투성이였다. 계절 사이의 경계가 모호했고, 눈물과 웃음 사이가 모호했고, 이별과 만남, 좋아함과 싫어함, 성장과 퇴보, 너와 나 그 모든 것들의 사이가 모호했다. 모호하다고 말하는 것마저 모호하다.
"난 어릴 적부터 내 이름이 싫었어. 고요라니. 나도 화가 있고, 슬픔이 있고, 떠들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는데. 고요라니. 그래서 반발심에 더 수다스런 여자가 된 것 같아. 그러나 난 알고 있었지. 수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누군가에게 한참 떠들어놓고 나면 내 맘은 한 없이 고요해져버린단 걸. 끝없는 마음의 파도를 타인에게 밀어내고 나면 난 진정 고요를 만나는 거야. 그 고요한 순간이 좋아. 헌데 언제부털까 그 고요가 내 삶의 젤 앞에 나서기 시작했어. 도무지 누구와도 얘기하고 싶지 않고... 언제까지나 그 고요 속에서만 머물러 있고 싶어 진 거야. 아빠가 죽은 다음날부터가 아냐. 그 이전, 어쩌면 태어나기 전부터였던 것 같은 느낌. 아득한 침묵, 고요한 호수 속으로 들어가 한 천년 간 숨어 있고 싶어 요즘의 난. 왜 그런 걸까."
여자친구는 모노드라마 배우처럼 허공을 향해 읊조렸다. 누구에게나 그러한 순간은 온다. 는 문장을 떠올린다. 여자친구에게 찾아오는 고요한 시간과 나에게 찾아오는 구름의 풍경은 어쩌면 비슷한 것이다. 그러나 또 그 둘은 미묘하게 다르다. 그 차이는 마치 해변의 모래 알갱이의 색이 저마다 다른 것과 같다. 분명히 다르지만 '이것이 다르다.'라고 정답을 말할 수는 없다. 여자친구와 나는 그 차이가 만들어내는 평행선을 계속 걸어 가리라. 그러면서 또 한 번 또 한 번 정답이 아닌 말들을... 드높은 오해의 바벨탑을 쌓아 올릴 것이다.
"여운이를 좋아하는 거 알고 있어. 나도 걔가 좋아. 여운이는 힘이 있어. 아무리 복잡한 문제도 단순하게 이겨내버려. 흘러가는 것을 흘러가도록 둘 줄 알아. 근데 난 어느 쪽이냐면 그렇게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는 쪽이 아니라 그 흐름 그 자체야. 흘러가던가, 고여 있던가. 난 그 속에 있지. 이해하겠어? 난 그 강물 속에 있는 거야. 근데 넌 내가 있는 강물 속에 없었어. 늘 저 멀리서 날 보고 있었지."
"그랬다고 생각해."
나는 먼저 대답하고 생각한다. 나는 그랬다. 그랬는가. 그리 되었던가. 사람들 중에는 자신을 배우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감독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고, 카메라맨이라고 느끼는 사람도 있으며, 평론가로 자리 잡는 사람도 있다. 나는 어느 쪽이냐면 카메라맨이라고 느끼는 쪽이다. 관찰하지만 딱히 평가하지 않는다. 특별한 관찰의 목적도 없다. 그저 아름다운 순간들을 두 눈에 담다가 멍해지곤 한다. 여자친구는 배우다. 그 아름다움을 좇다 보면 이내 길을 잃는다. 나는 왜 이 사람을 보고 있는가. 나는 왜 보고 있는가. 그런 의문에 빠져 있다가 어느 순간 또 다른 아름다움에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맞춘다. 나의 인생에는 '왜'가 빠져 있다. 그것에 결핍감을 느끼며 외로워진다.
"외로워. 외로워 죽을 것 같아."
"나도."
여자친구가 말하고 내가 대답한다. 아니 내가 말하고 여자친구가 대답한 걸까. 여자친구와 나는 함께 고층 건물들 사이로 조각 난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저 커다란 우주를 수많은 빛들이 여행하고 있다. 에테르라고 하는 어감 좋은 물질이 부지런히 빛을 배달한다. 여자친구와 나. 나와 여자친구의 여자친구, 여자친구의 여자친구와 여자친구. 우리, 혹은 그들의 마음 사이에도 숱한 빛들이 이야기를 담고 오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그 이야기의 1%만을 이해한다. 고 말한다.
"다음 주에 갈 거야. 영국으로."
"잡는 게 맞나? 이럴 땐."
"안 잡는 게 더 멋져."
"안 가면 안 될까?"
"안돼."
"다녀와 그럼."
"응."
"연락할 거니?"
"가능하다면 할게."
여자친구는 벤치에서 일어나 지하도의 계단을 내려간다. 점점 작아지는 여자친구를 보며, 나는 엉뚱하게도 여자친구가 소인국으로 떠난다는 생각을 한다. 여자친구가 소인이 되어버리면, 나는 더 이상 여자친구의 이야기를 들을 수도 없을 것-소리가 너무 작으니까-이고, 우리는 손을 잡고 플라타너스가 우거진 거리를 걸어갈 수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너무 슬픈 일인데 라고 생각하는 사이 여자친구가 커브를 돌아 사라진다. 여자친구가 정말 지구 상에서 사라져버린 것 같은 느낌에 소름이 돋는다. 죽음과 사라짐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집으로 가는 버스가 서는 정류장을 지나쳐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간다. 아래로 아래로. 끝없이 올라오는 차들의 헤드라이트 불빛을 아무렇게나 받아내며 내려간다. 그러다 다시 오르막길이 나오고, 다음은 내리막길이다. 아니, 오르막이다. 그리고 내리막이다. 내리막인가. 오르막이다. 어느 순간 내가 길을 오르고 있는지 내려가고 있는지 잊어버린다. 어쩌면 평지 위를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자친구의 여자친구 전화번호를 눌렀다가 신호음 세 번을 듣고 끊는다. 나는 어느 새 거대한 성 위에 올라와 있다. 눈 앞에는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고, 그 위에는 오래된 유럽풍의 집들이 있다. 거대한 구름들이 무심히 지붕을 건들며 지난다. 여자친구의 전화번호를 지운다. 아니다. 여자친구의 여자친구 전화번호다. 어쩌면 그 둘 모두이기도 하고 모두가 아니기도 하다. 어차피 모호한 청춘의 한 순간을 살아가고 있을 뿐.
수 킬로미터를 걸어 집으로 돌아온다. 잠자리에 들자 생각이 찾아온다. 나는 어쩌면 청춘의 한 페이지를 잃어버렸다고. 누가 그 페이지만을 찢어 갔는가. 나이기도 하고 너이기도 하며 우리이기도 하다. 스탠드의 불을 끈다.
| '여자친구의 여자친구'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