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Time for Disney.
살면서 이렇게까지 책과 커피, 연인들을 한꺼번에 볼 날이 있을까. 훗날 2022년을 떠올리면 책과 커피 그리고 책을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커피를 내리는 풍경이 펼쳐질 것이다. 난 요즘 주말마다 독립서점에서 커피를 내리며 책을 팔고 있다.
오후 2시. 도착하자마자 플레이리스트부터 바꾼다. 이 시간엔 ‘킹스 오브 컨비니언스 (Kings of Convenience)’가 어울린다. 적당히 시끄럽고, 느긋하다. 손님으로 올 때부터 지금까지 이 서점에서 많은 걸 얻었다. 산미 있는 에티오피아 원두를 좋아하게 되었고, 작가 '리베카 솔닛’과 ‘크리스티앙 보뱅’을 만났으며, 드립 커피를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원을 그리며 물을 부으면 커피가 태연하게 숨을 쉰다. 커피 빵이 뻐끔거리며 부풀다가 서서히 가라앉는다. 우려 지길 기다리며 고개를 들면 손님들이 보인다. 서가 사이로 사진을 찍어주는 연인들, 쪼그려 앉아 책을 뒤적이는 학생들, 책 한 권에 홀린 듯이 붙은 사람들까지. 종이 책이 사라질 일은 당분간 없을 것 같다.
좋아하는 걸 팔다 보니 사람들이 책에 홀렸으면 좋겠다. 책이 별로라도 옷이나 신발을 사는 것보단 낫지 않나.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 여유가 될 때마다 눈에 띄는 책을 가져와 온라인 서점 MD가 쓴 내용을 인용하여 책갈피를 꽂아둔다. 개인적인 감상을 적기도 한다. 누군가 우연찮게 책갈피가 꽂힌 책을 가져오면 순진하게 마음이 도톰 해진다. 이렇게나마 손을 뻗고 싶다. 뜻밖에 원하던 문장을 발견하는 데엔 마법적인 구석이 있고, 난 그런 순간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서가로 가서 책을 큐레이팅 할 때는 자못 비장 해진다. 우리 서점은 분류가 한눈에 파악되지 않는 게 묘미다. 이리저리 기웃거리다가 얼떨결에 흥미로운 책을 발견할 가능성이 높고, 그 가능성을 높이는 게 내 일이다. 그래서 구체적인 장르보다는 대략 뉘앙스가 가벼운 책과 무거운 책으로 나눈 뒤 책을 재배열한다. 너무 혼란스러워도 재미없고, 뻔하면 더 재미없다. 그중 내가 가장 심혈을 기울 이는 코너는 ‘탐험(Adventure)’ 섹션이다.
'탐험' 코너에 가면 그 단어를 곱씹게 된다. 그 전에는 생각해본 적도 없을뿐더러, 탐험은 순전히 동화나 디즈니의 세계관에서 펼쳐지는 기진맥진한 이야기였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역경을 헤치고 나서야 맞는 해피 엔딩이랄까. 보통 주인공은 원하는 걸 얻거나 깨달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간다. 해피하지 않더라도 주인공이 달라지며 끝나는 이야기. 혹은 기 빨리는 롯데월드 어드벤처. 이래 저래 자극적인 감정과 어울리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오기 전부터 이 코너에는 유독 산책 에세이가 많았다. 「궁궐 산책하는 법」부터 정지돈 작가의 서울 파리 산책 에세이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버지니아 울프의 「런던 거리 헤매기」, 칸트의 유작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등등. 산책에 대한 작가들의 열정은 시대를 초월한다. 그런 책에는 산책을 칭송하던 역사적 인물들이 다수 인용되어 종교처럼 산책을 찬양한다. 산책이 뭐 그렇게 대수인가 싶다가도, 페이지가 넘어 갈수록 산책이 일종의 탐험이라는 데에 동의하게 된다.
내키면 표지 만으로 큐레이팅을 하기도 한다. 돌이 띄엄띄엄 그려진 책 뒤에 바다가 그려진 단편집을 세워 둔다거나, 복숭아가 그려진 책 옆에 고동색 책을 놓는 식이다. 공원이다, 바다다, 하며 책을 배치하다 보면 책이 삼삼오오 모여들며 숲을 이룬다. 어울리는 건 어울리는 것끼리 나름대로 짝을 짓다 보면 새로운 장르가 생길 때고 있고 말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탐험일까.
탐험은 본래 ‘위험을 무릅쓰고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이다. 일상은 이미 미지수다. 과거는 일어났고 미래는 예측할 수 없지만 우린 결국 죽는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동안 탐험이 종료될 일은 없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픽셀 같은 인간이라면, 뚜렷한 목표가 없는 편이 당연한 걸까.
요즘은 하루하루가 충분히 우려 지지 않아 씁쓸하다. 처음부터 명확한 목표가 있다면 수월 할 텐데, 재미있어 보이는 게 왜 이리 많은지. 좋아하는 건 많지만 왕자님처럼 인생을 베팅할 만한 건 없다. 차라리 악당에게 납치된 동생이나 목소리를 잃을 정도로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면 좋겠다. 인어공주처럼.
공주는 뭍에 올라와 왕자에게 최선을 다했고, 사랑을 받지 못해 거품이 되었다. 이건 안데르센 동화고, 디즈니 영화에서 그녀는 왕자와 결혼한다. 그러나 현실은 왕자와 결혼한 공주보다는 거품이 된 인어공주 같다. 겉보기엔 원하는 걸 좇는 것 같아도 끝은 짐작할 수 없다. 인어공주는 다른 인어를 만났을 수도 있다. 평생 물속에서 왕자를 그리워했을 수도 있다. 혹은 더 큰 물고기에게 잡아 먹혔을 수도. 결혼이 끝인 디즈니 공주들과 달리 우리의 끝은 죽음이다.
평생 여기서 일하게 되면 어떡하지?
좋아하는 서점에서 일하고 있지만 불시에 불안감이 엄습한다.
욕심인가.
하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최선이 아니란 점만 확실해진다.
더 큰 세상을 보고 싶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 얘기를 듣고 싶다. 그렇게나 좋아하던 곳이 지겨워지다니. 아차, 물을 늦게 부었다. 그럼 커피 맛이 떨어지는데. 떫은 마음이 그대로 담긴 것 같다. 난 내가 뭘 원하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언제나 나를 더 좋아하고 싶었다.
어릴 때는 스스로를 미워하기로 작정한 애처럼 나쁜 점만 골라냈다. 생각할수록 24시간 동안 마음에 안 드는 애랑 붙어있다는 개념은 끔찍했다. 그냥 무작정 나를 좋아해 볼까. 작정하면 좋아하게 될 지도 몰라. 물론 말만큼 쉽지 않았다. 자신을 좋아하기 위해서는 마땅한 이유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백마 탄 왕자님 만큼 터무니없는 환상이었다. 날 좋아하기 위해선 내가 좋아할 만한 인간이 되어야 했다.
일찍 일어나서 운동을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면 기분이 좋다. 운동을 하고 샤워를 할 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글이 써질 때 만족스럽다. 잘 자고 일어나면 상쾌하다. 그러면 적어도 내가 미워지지는 않아서 그런 순간을 틈틈이 마련했다. 그러다가 때때로 시야가 흐려지고 체력이 바닥나면 죽고 싶다고 생각한다. 죽어도 괜찮을 것 같다.
더울 때 "아 더워." 하듯이 습관적인 말이다. 주로 혼자 있고 싶지 않은데 어쩌다 보니 혼자일 때 그런 단어가 스멀스멀 기어 온다. 덩치 큰 마음에 몸이 질질 끌려가다가 맥이 풀려버린 것이다. 그래서 더는 ‘죽고 싶다’는 단어를 믿지 않는다. 내가 너무 보잘것없어서 죽어도 될 것 같지만, 그건 기깔나게 잘 살아보고 싶다는 욕심이라는 걸 안다. 더 나은 대화, 더 많은 사랑, 어처구니없는 농담까지. 난 이번 생을 너무나도 잘 살아내고 싶었다.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내 삶을 사랑하고 싶었다.
키스로 날 깨워 줄 왕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찾으러 갈 왕자도 없다. 하루아침에 내가 공주가 될 리도 없고, 되고 싶지도 않다. 디즈니를 위한 시간은 없다. 그래도 만족스러운 순간을 떠올리면 몸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마음이 다져진다. 글을 더 잘 쓰고 싶다. 원하는 목소리를 내고 싶다. 정확하게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어떻게 탁월한 글을 쓰는지, 훌륭한 목소리를 내는지. 사랑은 매번 처음 같다. 그렇다면 하는 수 없다. 질리도록 글을 쓰고 노래할 수밖에. 끝까지 마음을 여는 수밖에. 그러니 오늘은 이만 집에 가자. 산책도, 탐험도, 다 좋지만, 샤워를 하고 다시 생각하자. 떠나기엔 좀 더운 것 같다.
2022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