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처보다는 정신과에 가는 편이 좋겠어
공시생 잔혹사 -14
by pajaroazul Feb 4. 2022
전에 말했듯이 난 심리상담을 꽤 오랫동안 받았다. 대학에서 학생이 받을 수 있는 횟수는 기간으로 치면 2년이다. 나는 선생님의 배려와 대학원의 열린 상담소 및 실험 참여 등 부가적인 수단을 더해 장장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었다.
처음 6개월 정도 상담을 받았을 때는, 내가 앞으로 같은 문제로 고생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완치됐다고 여긴 것이다. 새로 생긴 애인이 그 증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하지만,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다. 자신감에 차 상담소를 박차고 나간 지 일 년 후, 정확히 원점에 서있었다.
relapse. 재발. 慣性. 뭐라 이름을 붙이든 간에, 이제는 답을 원했다. 당시 우울증세가 있었는데, 그것 외에도 꽤 뚜렷한 성격장애의 징후가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중에서도 경계선 성격 장애나 연극성 성격 장애가 그럴듯해 보였고, 분명 어떤 질병이 있지 않고서야 엉망진창인 자신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고 믿었다. (구글링이 이렇게 위험합니다) 하지만 상담가는 쉬이 답을 주지 않았다. 오랫동안 신경전을 벌였지만, 그녀는 내가 히스테리 환자나 경계선 성격장애 환자일 것이라는 지레짐작에 웃는 표정으로, 하지만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답답함을 참지 못해 정신과까지 쫓아갔고, 겨우 세 번째 진료 만에 당돌하게 물었다.
"선생님, 저 우울증 아닌가요?"
"왜요? 무언가 확실한 게 있으면 좋을 것 같나요?"
"네. 병명이 딱 나와서 어떤 약을 먹으면 치료된다거나, 난 '우울증 환자요!'라고 말하고 다니면 좀 나아질 것 같아서요. 벌써 세 번째 진료인데, 성격 아니면 정신이 문제라든가, 일언반구 말씀이 없으셔서요.
"원래 정신과 진단은 시간이 좀 걸려요."
실망감에 오리처럼 주둥이를 내밀자, 의사 선생님은 나지막이 덧붙이셨다.
"우울증보다는 다른 걸 신경 써야 할 거 같아요. 불안 지수가 높게 나왔거든요. "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난 성격장애가 아니었다. (수년 전이니 다시 진료를 받아보면 또 다른 결과가 나오겠지만) 성격 장애 범주에 든다기보다는 범불안장애와 공황장애, 신경증, 강박증세가 있다고 보는 게 맞았다. 흔히들 '히스테리'라고 불리우는 것들.
아닌 게 아니라 요즘 불안해서 미쳐버릴 것 같다. 20대 들어서 잠을 제대로 잔 날과 그렇지 못한 날의 비율은 3:7이다. 이유 없는 불안, 압도적이고 거대한 불안에 잠에 들 수가 없다. 뇌가 잠이 들기 싫어서 일부러 이러나 싶을 정도다. 식은땀이 나거나 배가 꾸르륵거린다. 이유 없이 답답하고 눈물이 난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날엔, 자라고 할 때는 자지도 않더니 대낮에 기면증처럼 아무 곳에서나 정신을 놓아버린다. 환장할 노릇이다.
공무원 시험이 모든 것의 원흉은 아니다. 전부터 이랬다. 가령 남들이라면 한 번쯤 '망하고 말지'라고 넘길 대학 중간고사 하나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첫 대학에선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재수를 한번 하고 들어간 두 번째 대학부터는 이상한 보상심리가 생겼고, 집착하기 시작했다. 대학원 갈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장학금이 걸린 것도 아니면서, 성적표가 A0 이상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학업적 성과나 탁월성에 대한 집착을 넘어선 것이었다. 뭐랄까, 서재를 정리 할 때 이쪽 칸에는 소설만 있어야 해, 란 식의 결벽증. A+와 A만 모아야 하고, 부득이한 경우에도 B+까지만. 물론 B+를 받은 날엔 철저히 자기반성을 해야 한다. 쯧쯧, 받으나 마나 한 성적에 다행이라고 안도하고 있는 저 꼴 좀 보라지.
시험 중이든, 수업 시간이든 계획이 틀어지면 숨이 가빠지고 강의실이 쪼그라드는 착각에 빠진다. 토할 것 같은 기분에 몸이 비틀거리고, 눈앞이 핑그르르 돈다. 목소리를 쥐어 짜내어 조교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복도로 나와 숨을 몰아쉰다. 망할 놈의 매 시험마다, 과제마다, 약간의 스트레스가 추가되는 상황마다 이 짓거리를 해야 한다. 한심하다는 생각과 동시에 머리 한편에선 '넌 이 수업에서 90점 이상의 점수를 거둬야 해. 그러지 못하면 모든 게 도미노처럼 무너질 거야. 세상에, 이 쉬운 일조차 달성하지 못하는 게 실패자이지 뭐람? 네 옆에 앉은 동기는 과 수석에 올 학기에 22학점이나 듣는다는데, 넌 고작 15학점 들으러 학교 나오는 주제에 괜찮은 성적을 받는 일조차 못한단 말이야? 그러고도 너와 네 인생이 왜 그 모양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니?'란 목소리가 쾅쾅 울려 퍼진다.
웃긴 건 어찌 되었든 간에 시험을 볼수록 자격증이든 점수든 뭔가 성과가 쌓일 것 아닌가? 그런데 이런 '성과'가 내게는 자신감의 원천이 되기는커녕 더한 오리무중에 빠지는 계기로 작용했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토익이나 토플에서 고득점을 한다 한들 신촌에만 만점자들이 발에 챌 정도로 넘치며 제2, 3외국어 구사자들이 넘쳐난다. 대학원을 가자니 집안도 시원찮고, 문과잖아. 내가 여기서 뭘 잘해봐야 기껏 SKY에 밀릴 게 뻔하고, 이 학교마저도 재수씩이나 해서 온 곳이다. 대체 내가 해온 것들이 설령 성과라 한들 그래서 그게 뭘 증명한단 말인가? 내가 등신이고 남보다 더 많은 시간과 도움이 필요한 '모지리'라는 사실 외에 무엇을? 여기에 만족하는 행위가 우스꽝스러운 자위밖에 더 되지 않겠는가?
불안은 곰팡이처럼 모든 종류의 시험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모 아니면 도. 제 실력을 발휘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점점 알 수가 없었다. 컨디션이 좋은 10%의 경우는 그럭저럭 봐줄 만한 결과가 나왔지만, 90%는 아예 말도 안 되는 점수가 나왔다. 모든 건 훌륭해야 했다. 적당한 수준은 안 하느니만 못한 거였다. 외모도 마찬가지였다. 교정을 했지만 연예인 같지가 않았다. 70kg에서 50kg까지 살을 뺐지만 여전히 40kg 대가 아니었다. 왜 내 가슴은 납작하고 다리는 짧은가? 왜 난 힐을 신고 언덕을 오를 수 없는가? 왜 나는 완벽한 메이크업으로 8시 댓바람부터 학석사 통합 과정 수업에 참여할 우아함 또는 독기가 없는 것인가? 왜 내게 들이대는 남학생들은 죄다 허접스러운 인간들뿐인가? 설마 내 강박증이나 별로인 성격이 벌써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인가? 젠장, 망했네!
상담 시간에 과거를 수도 없이 헤집었지만, 늘 똑같은 이야기였다. 가족들은 한결같으며, 변할 마음이 없다. 아예 망한 인생이니 내가 하고 싶은 것, 궁금했던 것을 다 찌르고 다니면, 이상한 일에 쓸모없는 짓으로 인생을 허비한다고 했다. 비단 비난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고립되고 외로워졌다. 적당히 맞춰보려 하면, 그걸로 되겠냐고 했고, 나보다 점수가 높은 아이들의 이름을 거들먹이며 부럽다고 했다. 그래서 만점을 받아가면, 같은 성적으로 누구는 어디에 취직했다던데 왜 넌 똑같이 못하냐며 의아해했다. 비단 부모뿐만이 아니라 모든 가족 구성원들이 똑같았다. 더 끔찍한 건, 나도 그들을 닮아가고 있었다는 점이고.
그러니까 나는 아무도 만족시킬 수가 없었고, 뭘 해도 칭찬받을 수 없었으며, 영 시원찮다는 피드백밖에는 받지 못하는 인간이었답니다, 란 뻔한 이야기. 그렇게 20여 년을 보내니 스스로 확신이 있을 리 없지! 하지만 이제 상관없는 것이다. 누가 신경 쓴단 말인가. 내가 뭘 해야 행복한지 이젠 나도 관심 없다. 뭘 잘하는지 따위도 중요치 않다. 왜냐하면, 정말 아무도, 세상의 그 누구도 내 아픔이나 성장, 진심, 생겨먹은 방식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27년 만에, 드디어, 받아들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날 '예쁘게' 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건, 참으로 철없는 투정일 터이다. 인정받으려 사방으로 악을 썼고, 이랬다저랬다 했으며, 많은 실패를 겪었지만 죄다 허사였다. 내가 과거에 어떤 길을 선택했다고 한들, 또 오늘날 어떤 길을 선택하든 간에 난 앞으로도 똑같은 인간일 것이다. 자신과 지지부진하게 씨름하는 과정서 내게 남아있던 자신을 향한 일말의 존중이나 애정은 전부 증발했다. 이따금 죽고 싶다거나, 잠들어서 영원히 일어나지 않는다거나, 장례가 번거로울 테니 육신 또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면 좋겠다고 기도한 뒤 잠에 들려 기를 쓸 뿐이다.
병원에 가라고들 하지만, 모르겠다. 내가 가야 하는 걸까, 아니면 7년에 가까운 싸움에도 다시 바닥으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게 발목을 잡았던 사람들이 정신과에 가봐야 하는 걸까. 내게 살쪘다며 흉을 보고 자기 관리도 못한다고 비웃었지만 정작 본인은 자랑스럽게 거식증으로 체중을 유지하고 있었던 건 정상일까? 평생을 자식들에게 인생의 허무함과 우울함만 주야장천 늘어놓았던 당신이, 실은 우울증 환자가 아닐까? 연봉으로, 학력으로 친구들을 마구 재단하기에 더는 언급하지 않게 된 것일 뿐인데, 그런 날 '친구도 없는 사회성 부족한 인간'이라고 딱지 붙인, 정말 친구도 별로 없고 부르는 곳도 없는 당신이야말로 한 번쯤 인생을 돌아봐야 하는 것 아닐까?
언제까지고 과거를 부여잡고 통곡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확실히 어딜 가긴 해야 한다. 그게 정신과인지는 석연치 않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