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디에 살고 있는가
아이들이 방학을 했다. 공부하느라 수고했던 아이들을 방학때 좀 쉬게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 사실인데.. 아이들이 너무 풀어지는 게 눈에 보였다. 숙제 하라고 해도 안하고 책을 읽으라 해도 거의 안 읽었다. (이상하게 애들은 나와 씨름?을 하고 싶어한다. 둘다 여자아이들인데;;) 그래도 방학이니까 생각하고 며칠을 내버려두었다.
지난주 어느날 아침.
아이들 아침밥으로 간장+참기름+계란밥을 만들고 있었다.
뒤통수로 아이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물 주세요-'
'오렌지를 후식으로 주세요-'
'나는 귤로 후식을 주세요-'
아기새처럼 아이들은 이거저거 달라고 하고 있었다.
자녀가 방학한 가정의 일상적인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머리로 이해하고 있었으나,
내 안에서는 알수 없는 답답함과 화가 차오르고 있었다.
다행히 아이들에게 화는 내지 않았다. (짜증은 좀 섞여 나간 것 같긴 하다)
밥먹고 나서는 오만상 찌푸리며 설겆이를 했다.
너무 괴로웠다.
'이 뿌리 깊어 보이는 답답함은 도대체 뭘까?'
누가 '아니 왜 그러세요?' 라고 물어보면 사실 할 말은 있다.
"아 사실 제가 14번 이직한 경력자거든요. 마지막 직장에는 특별히 우여곡절이 있었고요. 지금은 사업을 준비중이랍니다. 그리고 지금은 마침 애들방학이라 애들을 보고 있어요. 그래서 힘든 가봐요. 아 그리고 저 일 없는 거 아니에요. 일 하고 있어요"
그러나, 나에게 물어보는 사람은 없어서 이렇게 말을 끄집어낼 수는 없다.
보는대로, 느끼는대로 얘기하자면 나이 40대중반 (이제 후반인가?)의 백수 아빠가 아이들에게 밥을 차려주고 설겆이 하는 장면에 나는 서 있다. '아 사실 제가..'라고 핑계를 대자니 구차하다.
사실 위 문장을 쓰면서도 마음이 착찹하다.
내가 내 자신의 사연에 머리로 충분히 이해가 가는데 여전히 착찹하다.
2월에 퇴사했으니 5개월이 지났다. 5개월의 기간동안 알차게 보냈다 ('나름'이라는 단어를 쓰려다가 뻇다. 단어를 쓰자니 기분이 별로여서)
성과로 말하자면 없는게 아니었다. 그러나, 여전히 나에게는 불안과 두려움이 있다. 내가 그간 일궈낸 성과라는 무화과 나뭇잎으로 내 몸을 가리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직장이라는 번듯한 옷을 갖고 있는게 더 낫다고 생각이 되고 있었다. 그게 더 나은 무화과 나뭇잎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무화과 나뭇잎은 '통념'의 다른 이름인 것 같다.
통념상 나는 회사원으로써 회사일에 골머리를 썩으면서도 아빠로써 아들로써 역할을 하느라 애쓰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 시간은 턱없이 부족해 '시간이 부족하다'는 excuse를 달고 살면서.
그러나, 지금은 가족일에 대해 excuse를 하고 싶지 않다. 내 일이니 내가 조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 스스로 시간이 많은 사람처럼 보인다.
사업이라 칭하는 것들이 어느정도 셋업이 되자, 여유가 조금 생긴 건 사실이다. 그러나 벌이가 든든하지 않으니 남는 시간만큼 불만족이 더 쌓여가는 것 같다.
어차피 은퇴하는 거 미리 준비하자라는 생각이었는데, 잠시도 가만히 있는 것이 도무지 성에 차질 않는다.
회사에서는 숨만 쉬어도 미터기에 돈이 쌓이는데, 지금은 숨만 쉬면 안된다.
뭐라도 돈이 될만한 무엇이라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강박이라면 정말 이런 강박이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산성 강박.
그러나 슬슬 본색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놀자고 해도 심하게 짜증내며 몰아냈다. 숙제하고 책이나 읽으라고.
이렇게 화를 내고 나면 나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아, 쉽지 않다.
도대체 다른 은퇴하신 분들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그분들은 어떻게 이 시간들을 보내고 있나? 내가 겪는 이 짜증과 불안과 외로움과 두려움. 다 들쳐 엎고 계실텐데. 이것을 어디서 해결하고 계실까? 아니면 다른 곳에 신경쓰며 모르는 척하고 있는 건가?
돈이 많은 건 좋을테지만, 시간이 많은 건 정말이지 너무나 곤혹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다가올 넘쳐나는 시간을 마주하는 것이 두렵다.
그러다 한줄기 빛을 맞이했다. 지난주 예배 말씀이었다.
성실한 사람들은 오늘은 없고 내일을 위해서만 산다...성실한 사람들은 사실 불안하다. 알수 없는 내일을 위해서만 생각하고 거기서 머물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고 물끄러미 바라볼때가 있다. 어린아이는 지금을 충분히 누린다. 미래를 염려하여 오늘을 걱정하는 모습은 없다. 오늘이라는 현재(present)를 선물(present)로 충분히 누리는 자들이 바로 어린아이들이다...우리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오늘을 누려야한다
나이가 들수록 지금 내가 지금 보내는 시간이 소중함을 느낀다. 그럴때 화가 올라오더라도 참게 된다. "아니지. 이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 시간이지. 이 시간은 소중하지. 시간을 허비하지 말자"'
눈이 확 띄였다. 그냥 화악-.
20대가 되면 떠나갈 아이들이 그려졌다.
그리고 지금이라는 소중한 시간들을 알 수없는 미래를 향한 고민의 시간들로 처밖아 놓고 있는 내가 보였다.
정리가 되었다.
미래를 준비하는 건 필요하다.
그러나 완벽대비란 없다. 불가능하다.
불확실성은 받아들이고 미래를 준비할때
나는 비로소 지금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아내가 해준 카레.
우리 가족 모두 아내의 카레를 사랑한다.
10년넘게 갈고 닦아진 요리이기때문이다.
이 얼마나 고마운 기쁨의 요리인가.
와 신기하다.
카레를 생각하니 지금 내 입가에 미소가 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