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라소라빵 Dec 13. 2021

기후위기_노는 누가 저어야 하죠?

일단 나부터?

저번 시간에는 '지구가 멸망한다면?'이라는  SF적, 영화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실제 기온이 오르면 벌어지는 기후 시나리오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엔 그렇게 밝혀진 시나리오가 임박했는데도 불구하고 기후행동이 어려운 이유에 대한 고찰입니다. 똑똑한 사람들이 내놓은 시나리오는 책으로도 제법 소개가 많이 되어 있고, 교양적인 수준으로도 인지하고 있는 사람은 많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기후재난을 다루는 영화를 보고나서 ‘기후위기가 정말 심각하구나...’라는 생각에 책을 추천받아 읽거나, 채식주의, 제로 웨이스트, ESG경영 같은 친환경 트렌드에 관심을 가지고, 직접 관련 상품을 구매해 사용하는 개인적 실천까지 발전했을 지도 모릅니다. 


특히 2021년은 놀라울 정도로 ‘제로웨이스트’, 나 ‘ESG’경영이라는 친환경키워드가 많은 사람들의 화두에 오르곤 했죠. 이미 해결책을 알고 있는 기업과 정부는 녹색 에너지의 형태로 해결책을 개발하기 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해결책을 설치하고 확대하는데 필요한 정치적 단결과 경제적 힘의 집결, 의식의 유연성은 아직 갖추지 못한 상태입니다.  얼마전 글래스고에서 마무리 된 COP26은 초창기 의제였던 '석탄연료 사용 폐지'에 극적으로 가까워지는 듯 했으나 결국 '단계적 감축'으로 마무리 되며 사실상 이전 목표였던 기온 상승 2도 내로 억제라는 목표는 포기한 듯 보입니다.

단계적 폐지가 사실상 번복된 상황에 고개를 숙인 알로크 샤르마 COP26 의장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시스템을 세운다는 것은 전 세계의 문화를 쌓아올린 탄소 기반의 교통, 에너지, 인프라, 공업과 농업 시스템을 처음부터 뜯어 고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 탄소 기반의 시스템에 세워진 의식과 문화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이는 개인적인 실천이 아닌, 기후를 구제하겠다는 공동의 목표아래 정치적인 행동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즉 기후를 위해 표를 던져야 하고, 표심을 잡기 위해 친환경적인 정책을 내세우는 정치인까지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앞서 얘기했듯이 이러한 정치적인 기후움직임은 포착하기도, 실천하기도 어렵습니다. 우선적으로 다 같이 수행해야하는 팀 과제의 성격인 기후행동에 대한 효능감이 잘 체감되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지만, 대개 많은 사람들의 인간의 역사와 문명에 대한 끊임없는 진보를 믿고 있고, 그 진보의 혜택이 자신에게도 돌아올 것이라 믿기 때문이죠. 사실 상 인류의 역사 전체로 보면 5%에 불과한 발전의 역사가 일탈에 가깝고, 무려 그 짧은 기간 동안 지구를 황폐화시켰는데 말입니다. 무엇보다 기후 위기를 위한 단합이 어려운 것은, ‘기후위기의 책임의 소재가 누구에게 있느냐?’를 명확하게 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노를 저어야 하죠? 


기후위기에서 분명 가장 탄소를 많이 배출해서 피해를 일으키는 사람과 피해를 입는 사람은 명확히 존재합니다. 우리는 흔히 자연법상의 질서에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보상하는 형태를 일반론적인 정의로 합의합니다. 그렇다면 기후 위기에 대한 책임은 누가 가장 강하게 져야할까요? 지구 온난화의 진위를 둘러싼 많은 공방이 있었지만 ‘인류세’라는 지질구분학적 용어가 학계와 일반인들 간의 간극을 뛰어넘어 유행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일단 인간이 나쁜 것은 확실합니다.


원래 지질학에서 '세'란 지질학적 변화가 가시적으로 보일 때 붙은 지층의 세대를 구분하는 개념으로, 인간이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의 세월이 지나야 구분되는 층이 발생하지만 인간이 눈부신 현대문명을 쌓아 올린 지 몇 십 년이 채 되지 않은 이 시점에 그런 변화를 가져왔다는 놀라운 사실 덕분에 현대를 인류세로 드라마틱하게 정의하자는 주장이 등장한 것이죠. 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오즈본 월슨(Edward Osborne Wilson)은 수많은 생물종이 사라지고 곰팡이 세균 정도만 남은 더욱 암울한 미래를 예견하며. 일명 고독세라는 거창한 이름까지 붙이고, 누군가는 불로 음식을 조리하면서 시작된 인간의 문명이 내연기관으로 발생한 기후오염으로 망하게 생겼다며 '화염세'라는 얄궂은 이름을 붙이기도 하지만, 모두 공통적으로 인간이 자연에 끼친 해로움을 강조하는 개념입니다. 그리고 그 책임을 져야하는 것도 결국 인간이 될 것입니다.


그 책임을 조금이나마 개인적 차원에서라도 감당하고자 ‘제로 웨이스트’라이프 스타일이나 탄소 감축에 동참하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자세입니다. 하지만 극적인 변화를 위해선 단연코 국가 레짐 단위의 변화, 즉 투표를 통한 정책 변화가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국가 내부에서 여러 정책 안건을 뚫고 기후 위기가 메인 안건으로 올라오기는 매우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국가 내부에서 국가 간 세계경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부에서 투표를 통해 자본주의와 경제성장의 논리를 이겨낼 수 없다면 세계 질서를 위해서라도 가장 많은 피해를 낸 자, 즉 역사 속에서 이산화탄소를 가장 많이 배출한 국가를 특정해서 그 책임을 물게 하는 것이 최선의 답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곧 이러한 판단을 내리기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선 책임 기준을 지금 당장 오늘 날의 탄소 배출량, 아니면 과거에서 모두 합친 양을 따질 것 인지부터 의견이 분분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번 따져 봅시다. 누구한테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 합리적일까요?

Oak Ridge National Laboratory, "global. Regional, and National Fossil-Fuel CO2 Emissions

다행히 역사 속의 이전 세대들에게 책임을 돌리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물론 탄소기반 문명은 18c세기 영국에서 석탄이 탈 때부터 시작했지만 화석연료가 배출한 이산화탄소의 절반 이상은 1989년 이후에 배출되었고, 1751년 이후로는 1,578기가톤, 1989년 이후 820 기가 톤의 이산화탄소가 방출되어 이전 세대들이 내보낸 이산화탄소보다 우리 세대가 내보내고 있는 탄소량이 다행히(?)도 압도적으로 많아 안일하게 역사의 탓으로 돌리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체제를 바꾸지 못한 책임은 있겠지만 그만큼 우리의 집단적 행동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Carbon Dioxide information Analysis Center, Oak Ridge National Laboratory, "global. Regional, and National Fossil-Fuel CO2 Emissions"(Oak Ridge,2017)


그렇다면 역시 현재 탄소 배출량이 높은 국가 순으로 줄을 세워 그만큼 책임일 지게 하는 것이 타당할 지도 모릅니다. 2018년을 기준으로 배출량을 따지면 중국이 27%, 미국이 15%, EU가 9%, 인도가 7%로 20세기 후반 경제 강국으로 성장한 국가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COP26(유엔기후협약 당사자 회의)에서 밝힌 1.5도 이내의 기온 억제라는 감축목표에 있어서 해당 국가들의 협력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후담론에서 국가단위의 해결책은 제대로 작동한 사례가 드뭅니다. 산업혁명 이래 탄소기반 문명에선 화석연료를 더 많이 사용할수록 국력은 강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국가경쟁력을 위해 기후는 언제나 차후의 문제로 미뤄졌으며 그 결과가 세계 2위의 탄소 배출국인 미국이 이름에 걸 맞는 책임은커녕 2017년 6월, 트럼프 대통령의 지휘아래 기후 협약이 미국의 이익에 반한다며 탈퇴 선언을 하고 했고, 심지어 비용이 많이 드는 친환경 에너지 대신 효율이 좋은 화석 연료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망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기후위기는 국력 우위를 지키려는 목표의 하위 목표로 설정되어 기후변화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보다는 국가 간 경쟁 조건과 득실을 계산해 경쟁에서 승리하는 시나리오만을 찾게 됩니다. 


따라서 국가레짐을 기준으로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국가레짐을 기준으로 탄소배출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은 효과적이지 않았다.

2) 탄소기반 문명에서 탄소배출=국력 인 상황에서 기후문제는 언제나 국가경쟁력에 밀려 후순위 의제였다.

3) 국가 간 경쟁 조건과 게임 이론을 가정할 시 승리하는 시나리오만 찾느라 국제협력은 뒷전이 된다.



국가 단위의 책임 문책이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북반구와 남반구,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의 탄소 배출을 둔 딜레마에서 또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개도국은 빈곤과 기후위기 사이의 딜레마에 봉착해 있는데, 선진국의 탄소 기반 경제 모델을 그대로 따라서 빈곤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탄소 문명을 가속할수록 기후위기에 선진국에 비해 취약하기에 자신들 스스로에게 거대한 피해를 입히는 형태로 거대한 이자가 쌓여 돌아오게 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개도국의 입장에서 '공평하지 않다'는 이유로 이들의 무제한적인 탄소 배출을 허락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비록 개도국은 탄소 기반의 문명을 맘껏 누려 발전을 이룩한 선진국이 자신들의 탄소 배출을 제한하는 것은 '선착순'의 논리로 비춰져 공평하지 않다고 불만이 높을 순 있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탄소배출을 무제한 허용하는 것은 기휘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적절한 해결책이 될 수 없기 때문이죠. 인당 탄소 배출량은 적지만 인구와 경제규모로 인해 국가 전체의 탄소 배출량이 높은 중국과  브라질 등 국가가 이러한 케이스에 해당합니다. 이런 국가들에게 전체 온실 가스 배출량에 대한 책임을 바탕으로 협조를 요구하는 것은 기후 재난을 해결하는데 필수적이지만, 대개 역사적인 이유, 혹은 현실적인 이유를 핑계로 기후 대응에 필요한 엄격한 기준을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국가 간 이득관계를 넘어선 다른 책임기준으로 제시되는 것 중 하나는 기업단위의 책임제입니다. 1751년부터 2010년 사이 약 260년 동안 배출된 온실가스의 63%는 90개의 탄소 메이저 기업으로부터 발생했고, 이에 대한 책임과 역할을 해당 기업들이 감수해야 된다는 주장입니다. 90개의 메이저 기업은 주로 화석연료와 시멘트, 철강 등 분야의 기업으로 온실가스를 주로 배출하는 업계에 대해 강력한 규제를 고려하는 것 또한 타당한 책임분배의 원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국가와 달리 소비자들과 투자자들이 타깃을 특정해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도록 압박을 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행동에 대한 효능감을 느끼게 해, 소비자들이 더욱 기후위기에 동참하게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후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노를 젓기 위한 여러 방안 중 저를 가장 매혹시켰던 것은 기후위기를 인권의 시각으로 바라볼 것을 제안한 프레임의 전환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인권을 기준에서 바라보는 기후위기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이전 01화 갑자기 뜬금없지만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