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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작 Feb 10. 2021

툴을 쥔 인간은 툴의 방식으로 말하고 생각한다.

황정은, <디디의 우산> ㅣ


툴을 쥔 인간은 툴의 방식으로 말하고 생각한다. 

- 황정은, <디디의 우산> 



나는 포도가 새겨진 거울을 청소할 때 쓸데없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쳐다본다. 응접실의 오후 햇살에 비친 내 피부는 희미해져 가는 멍 자국처럼 옅은 자주색이고, 이는 푸르스름하다. 나는 나에 대해 오갔던 이야기들을 모조리 떠올려 본다. 나는 잔인한 악마이고, 불한당에게 끌려가 목숨이 위험했던 순진한 희생양이고, 나를 교수형에 처하면 사법 당국이 살인을 저지르는 게 될 만큼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이고, 동물을 좋아하고, 안색이 밝은 미녀이고, 눈은 파란색인데 어디서 말하기로는 초록색이고, 머리는 적갈색인 동시에 갈색이고, 키는 크거나 작은 편이고, 옷차림이 단정하고 깔끔한데 죽은 여자를 털어서 그렇게 꾸민 거고, 일에 관한 한 싹싹하고 영리하고, 신경질적이며 뚱한 성격이고, 미천한 신분인 것에 비해 조금 교양이 있어 보이고, 말 잘 듣고 착한 아이라 나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없고, 교활하며 비딱하고, 머리가 멍청해서 바보 천지와 다를 바 없다. 나는 궁금하다. 내가 어떻게 각기 다른 이 모든 사항들의 조합일 수 있을까? 

- 마거릿 애트우드, <그레이스> 



<오늘의 파편들> 


1.  

   2020년 12월 23일 한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박원순 시장 피해자의 실명이 적힌 편지를 공개했다. 그 편지를 보진 않았지만, 그 교수는 피해자가 박원순 시장에게 '자기 동생 결혼 기념 글까지 부탁한다. 성추행한 사람에게 그런 걸 부탁할 수도 있는 모양이다'라고 SNS에 썼다.

  이 글이 비난을 받자 그는 말한다. "시력이 대단히 나빠 자료 구별에 어려움이 있다. 이름을 미처 가리지 못했을 뿐 고의성은 전혀 없었다." 

  

  2. 

  황정은의 <디디의 우산>을 읽고, 그 책 속에서 언급된 마거릿 애트우드의 <그레이스>를 읽었다. 단순한 언급일 뿐이었지만 황정은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과 장소는 달랐지만, '툴을 쥔 인간'이 되지 못한 그들의 삶은 '툴을 쥔 방식의 사람'에 의해 해석되고, 강제당한다. <디디의 우산>도 <그레이스>도 각기 다른 사람들 입장에서 서술되지만, 그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전체 그림을 그려나간다. 

  

3.

  1996년 발표된 <그레이스>는 마거릿 애트우드가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흥미로운 것은 애트우드가 같은 사건을 바탕으로 20여 년 전  CBC 텔레비전 드라마 <하녀>란 작품의 각본을 썼다는 것이다.(연보를 보면 작가가 그보다 훨씬 일찍 이 사건과 관련된 저작물에 영향을 받은 걸 알 수 있다.)  아무튼 저자는 후기에서 '(자신이 작업한 1974년 <하녀>는) 이제 신뢰할 만하다고 말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일방적인 '툴을 쥔 방식의 시선'에서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레이스는 하녀다. 그녀는 주인과 그의 정부를 살해·교사 혐의로, 종신형을 받는다. 그러나 그와 관련된 기록은 모두 놀랄 정도로 모순적이다. 마거릿 애트우드는 <그레이스>에서 그 모순을  차근차근 짚어나간다. 그녀가 진짜 살해했는지, 혹은 이중인격인지, 혹은 무고한 희생자인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툴을 가진 자'들의 시선과 방식이다.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 의아하게 묻는다. 

  '내가 어떻게 각기 다른 이 모든 사항들의 조합일 수 있을까?  


4. 

  이를 대변하는 것이 그레이스와 끊임없이 상담하는 정신과 의사 사이먼 조던이다. 그는 '정의'를 외치고 매우 온화한 성격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모든 이들을 자신이 편한 식으로 해석하고 이용한다. 그러나 작가는 이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사이먼은  끊임없이 자신의 관점에서 말한다. 불륜 관계를 맺은 여주인을 정신병자라서, 교도소장 딸에게는 금방이라도 청혼할 듯 흘리면서도 어쩔 수 없어서, 집안일을 잘 해내는 하녀는 못생겼다며 이 모두를 비웃다가 아주 비열한 방법으로 도망친다. (그리고 뒤 마무리는 그의 '엄마'가 한다)  

  역설적으로 사이먼이 가장 진실해지는 순간은 그레이스와 상담하는 감옥 안이다. 아무런 툴도 갖지 못한 그레이스의 아주 상세한 묘사는 그를 다른 위치로 데려간다. 그러나 사이먼은 툴을 버릴 생각이 없다.  


5. 

  2020년 대한민국에서 '툴을 쥐고, 툴의 방식대로 말하고 생각하는' 한 교수의 글을 본다. 그는 평생 경험해 본 적 없는 세계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무지'가 폭력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어떤 이유로든 사적인 편지와 실명을 공개한 데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더욱이 지금 같은 사안일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도 저런 사과문(?)을 당당히 올릴 수 있다는 것에 분노를 느낀다.    


  피해자이든 아니든, 친절한 글을 보낼 수도 있고, 웃는 이모티콘을 보낼 수도 있다. 피해자는 납작하지 않다. 피해자의 정체성을 오로지 '피해자'로만 두는 저런 시선이 2차, 3차 가해를 만든다. 식음을 전폐하고 쓰러져 울고 있지만은  않다. 사는 게 그렇지 않은가. 다른 모든 슬프고 힘든 일을 겪은 이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직장에 나가야 하고, 사회 속에서 생활하며 웃고 농담도 한다. 그렇게 산다. 그러나 동시에 권력을 가진 이의 비서이며, 절대적 약자다.  피해 유무를 여기서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피해 유무와 저런 글과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6. 

이브에게 주어진 진짜 저주는 무슨 문제가 생기자마자 그녀 탓으로 돌렸던 바보 같은 아담을 참고 견뎌야 했던 거라고 말했어요.(p245) 

선생님, 저는 그 의사가 칼로 메리를 죽였다고 생각해요. 그 의사하고 어느 집 도련님하고 둘이 서요. 실제로 결정타를 날린 사람이 진짜 살인범이 아닌 경우도 있잖아요. (p265) 

- 마거릿 애트우드, <그레이스> 


  실제 현실에서처럼, <그레이스>에서도 진짜 그레이스가 살인(혹은 교사)을 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과정 자체를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수많은 살인범들이 보인다. 우리의 현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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