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희 감독 <찬실이는 복도 많지>
고백한다. 뜬금없이. 나는 <찬실이는 복도 많지>(김초희 감독)의 팬이다. 이 영화는 정말 사랑스럽다. 장면 하나하나가, 대사 하나하나가 그렇다. 그리고 무엇보다 찬실의 캐릭터가 특히 사랑스럽다. 현실에 발붙이고 있으면서도 내가 좋아하는 걸 끊임없이 찾아 나선다. 솔직하다. 스스로에 대한 존엄을 지키며 타인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는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페르소나 찬실이를 내세운 김초희 감독의 진심이 있다. ‘장국영과의 대화, 홍상수 감독에 대한 은유, 버려지는 키노 잡지 위의 집시의 시간, 오즈 야스지로 영화’ 등 영화를 사랑하는 감독의 진심은 이 영화 곳곳에 뿌려져 있었다. 반짝인다. 그리고 그 사이로 주인집 할머니(윤여정 배우)와 찬실이(강말금 배우)의 일상이 피어난다.
주인집 할머니(윤여정) : 나는 이제 하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어. 늙으니까 그거 하나는 좋다.
찬실 (강말금) : 진짜 하고 싶은 일이 하나도 없으세요? 그런 사람이 세상에 있어요?
주인집 할머니(윤여정) : 나는 오늘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어. 대신, 애써서 해.
- 김초희 감독 <찬실이는 복도 많지> (2020)
주인집 할머니는 시종일관 담담하다. ‘늙어서 하고 싶은 것도 없다.’고 한다. 하나 있던 딸을 앞세웠지만, 눈물짓거나 심하게 배타적이거나 괴팍하지도 않다. 대신 오늘을 산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하고 싶은 일에 마음을 담아 애써서 하며 산다. 콩나물을 얼마나 애써서 다듬는지, 특유의 비릿한 향이 화면 밖까지 새어 나온다. 그렇게 둘은 심심하지만 심심하지 않은 우리의 '별것 아닌 일상'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준다.
할머니가 한글을 배우는 것도, 생활이 불편해서지 별다른 이유는 없다. 담담하다. 시 쓰기 숙제를 하려고 낮은 상에 앉은 할머니는 화분을 물끄러미 본다. 찬실은 시는 '아무거나' 써도 되지만, '아무렇게나' 쓰지 말라고 한다. 할머니는 한 줄만 써도 되냐고 묻고는 딱 한 줄을 쓴다. 찬실은 그 한 줄을 보고, 읽지 못하고 울먹인다. 할머니는 자신만의 언어로 담담하지만, 애절한 목소리로 그 한 줄을 읽는다.
"사라도 꼬처러 다시 도라오며능 어마나 조케씀미까
(사람도 꽃처럼 다시 돌아오면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 김초희 감독 <찬실이는 복도 많지> (2020)
작은 상 위에서 일어난 '아무 일도 아닌 것 같은 이 사건' 이후, 찬실은 버리려고 내놨던 키노 잡지와 <집시의 시간> 비디오테이프를 다시 방으로 가져온다. 자신이 '애쓰고 싶은 시간'을 다시 가져온 것이다. 장국영으로 은유되는 순수한 찬실의 마음을 온 우주가 응원한다. 찬실은 자신의 삶에 영화가 전부는 아니지만, 중요하다는 걸 안다. 그래서 그 중요한 것을 소중하게 지키기로 한다. 찬실이가 영화 속에서 오즈 야스지로 영화를 예로 들어 이야기했던 것처럼 '아무것도 안 일어난 듯 보이지만'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언급하지 못한 수많은 장면에서 '아무거나 괜찮다' 싶은 얼굴을 한 배우들이, 아무거나 등장하는듯한 신에서, 특별하지 않은 대사를 한다. 그러나 절대 '아무렇게나' 하지 않는다. 오늘은 '콩나물을 툭툭 다듬는 장면'만 애써서 담아야지 한 것처럼 모든 장면을 애써 담는다. 여기저기 다정이 흘러넘친다. 공들여서 꾹꾹 눌렀다가 여기저기서 폭폭 터뜨린다. 장면 하나하나에 복이 넘친다. 아, 이 영화를 본 나는 복도 많다. 더 많은 분이 이 복을 받아 갈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