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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작 Aug 25. 2020

결국 무엇을 묻어둔다는 것은 시차(時差)를 만드는 일

박준, 「천마총 놀이터」『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오늘의 시차>

 

  외출하며 어떤 책을 들고 갈까 하다가 가방에 박준 시집을 넣었다. 여러 가지가 이유가 있지만 '가벼워서'가 가장 컸다. 모두가 스마트폰을 보는 2호선에 앉아 박준 시집을 꺼내 들었다. 우연찮게 옆 사람도 책을 꺼내 들고 있었다. 지하철에서 모르는 이와 나란히 앉아 책을 보는 것 참 오랜만이다.


  대학시절 나는 주로, 2호선에서 책을 읽었다.  학교까지는 편도 50분이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많은 이들이 읽을거리를 들고 탔다. 나도 좋아하는 노래를 골라 담은 mp3를 들으며, 책을 읽었다. 술술 책장이 넘어갔다. 열심히 보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지하철이 지상으로 올라와 한강을 넘고 있었다. 멀리서 보는 서울은 아름다웠다. 책을 두고 오거나, 50분을 다 채울 수 없는 분량이면 신문 가판대에서 한겨레 21나 씨네 21 같은 잡지를 샀다. 적당한 소음과 주기적인 흔들림 그리고 독서. 그렇게 난 2호선 통학을 즐겼다.

 '천마총 놀이터'를 읽으며, 나도 '내가 묻어두어서 만들어진 시차'를 경험했다. 처음은 대학시절의 지하철 독서였다. 그런데 시를 읽다 보니 전혀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수학여행에 못 가고 벤치에서 몸을 김밥처럼 말아 넣는 놀이를 하고 있을 때 친구들은 첨성대를 돌아 천마총으로 향하고 있었을 겁니다 뒷산에서부터 저녁이 미끄러져 내려왔습니다 철봉에 거꾸로 매달리는 놀이, 혀가 마른 입술을 아리게 만나는 놀이, 시소가 떠난 무게를 기억하는 간단한 놀이, 시소가 떠난 무게를 기억하는 간단한 놀이, 누가 부르는 것 같아 자꾸 뒤돌아보는 놀이 들을 모래에 섞어 신발에 넣었습니다 네가 돌아오면 '경주는 많이 갔다 와봐서, 바다로 가족여행을 다녀왔어'라고 신
발을 털며 말하고 싶었지만

(...)


고분처럼 뚱뚱한 동네 엄마들이 깨어날 시간입니다 저는 아직 제 방으로도 못 가고 천마총에도 못 가보았지만 이게 꼭 거리의 문제만은 아니어서요 결국 무엇을 묻어둔다는 것은 시차(時差)를 만드는 일이었고 시차는 그곳에 먼저 가 있는 혼자가 스스로의 눈빛을 아프게 기다리는 일이었으니까요


- 박준,「천마총 놀이터」 일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천마총 놀이터'에서 아이는 모두가 수학여행을 떠나 텅 빈 운동장 놀이터에서 혼자 논다. 아이는 모래를 신발에 가득 담으며, 수학여행을 안 간 대신, 바다에 다녀왔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이에게, '수학여행을 안 간 대신 뭐 하고 놀았냐고. 괜찮았냐고.' 물어주는 친구는 없다. 아이의 마음이 내게 스며, 내가 묻어둔 아픔이 시차를 가지고 내게 다시 온다. 어른이 되었다고, 시간이 흘렀다고. 묻어둔 일이 그냥 괜찮아지는 일은 없다.  


  나도 그런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난 국민학교를 나왔지만) 6학년 시절, 친한 친구가 날 외면했다. 짝을 지어서 뭘 하는 것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마지막에 남았고, 친하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내가 아닌 다른 애를 택했다. 둘이 걸어가는 모습. 나를 흘끔거리는 모습. 그 기억이 아직 아프다. 어디선가 외면되거나 배제되는 경험을 할 때마다, 나의 아픔의 원형은 이 운동장인 것 같다. 강렬했던 햇살, 먼지가 날리던 운동장. 그리고 당황했고 쓰렸던 찰나의 기억.


  그렇게 순간의 아픔을 현재의 내가 본다. 묻어둔 시차가 만들어 낸 응시다. 조금 아리지만 또 고맙다고 생각하며, 운동장에서 힘없이 걸어가는 그 시절의 나를 토닥여준다.




아이들의 시차. 좋지만 벌써 그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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