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식, 「이탈한 자가 문득」『황금빛 모서리』
한동안 동네 서점에서 함께하는 시 필사에 참여했다. 평소에는 지기가 시를 올려주지만, 마지막 주에는 필사 참여자(시벗)들이 함께 쓰고 싶은 시를 추천했다. 김중식 시인의 <이탈한 자가 문득>이라는 시는 한 시 벗님이 추천했다. EBS 국어 선생님의 입시설명회에서 이 시를 접했다고 했다. 열심히 해서 경쟁에서 이겨서 꼭 좋은 대학 가는 - 찬란한 태양처럼, 냉철한 뭇별처럼 궤도를 지킬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을 설명했을 선생님이 마지막에 이 시를 아이들에게 읽어줬던 것이다.
우리가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 김중식, 「이탈한 자가 문득」 『황금빛 모서리』 (문학과 지성사 1999)
나는 대학 1년을 마치고, 다시 재수학원에 다녔다. 당시 적성과는 전혀 맞지 않는 전자전기공학부에 다니고 있었다. 정말 견딜 수가 없어 재수를 결심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때의 나는 아주 큰 용기를 가지고 궤도를 이탈한 것이었다. 마치 나만 낙오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의 재수를 반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국립대였고, 장학금을 아주 잘 주는 전공이라 등록금을 거의 내지 않고 다녔다. 집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있었으며, 졸업과 동시에 대기업에 취직할 확률이 높았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너무나 불행했다. 미래를 상상하니 더 불행했다. 도저히 그 길을 갈 수가 없었다. 결국 휴학을 했다. 아무도 응원하지 않는 길인데, 학원비까지 내달라고 할 수 없었다. 한 학기는 햄버거 프랜차이즈 가게, 과외 등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았다. 다음 학기에 그 돈을 가지고 재수 학원에 갔다.
그때의 나는 외로웠다. 쓸쓸했다. 그래서 공책 앞에 박노해 작가의 시 「굽이 돌아가는 길」이 적었다. 당시 나에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나 스스로 말해야 했다. 아침저녁으로 그 시를 보며 스스로 괜찮다고 말했다. 그렇게 그 시간을 견뎠다.
곧은길 끊어져 길이 없다고
주저하지 말아라
돌아서지 말아라 삶은 가는 것이다
그래도 가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건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다는 것
- 박노해 「굽이 돌아가는 길」 (일부) 『사람만이 희망이다』 (느린걸음, 2015)
‘네 옆에 모두가 경쟁자고, 그들보다 빨리 잘 달려서 이겨라!’라고 말하는 입시 설명회. 그 행사 마지막에 시를, 그것도 「이탈한 자가 문득」이 낭독되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온화해진다.
입시를 준비하는 입장에서는 안정적인 궤도를 벗어나면 마치 세상이 끝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입시 구조는 반드시 누군가를 튕겨 낸다. 그 누군가가 누가 될지는 단순히 '실력'만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는 걸, 거기에 앉아있는 누군가는 반드시 궤도를 이탈할 수밖에 없다는 걸, 그래도 세상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선생님은 알고 있다.
최선을 다해 좋은 대학에 가라고는 하지만, 혹시나 그 궤도를 이탈하게 되더라도 괜찮다는 걸, 그걸 말해주고 싶었던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 시에 실려 있던 그 온기 어린 마음이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나에게도 전해진다. 문학의 힘은 참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