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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작 Oct 20. 2023

모든 걸 알면서도

앨리스 먼로, '밤' 『디어 라이프』 (문학동네, 2012)


  요 며칠 이상한 꿈을 꾸고 있다. 오래전에 사귀었던 친구들이 나온다. 그제는 아주 친했던 대학 동기가 나왔고, 어제는 공동육아를 같이 했던 친구가 나왔다.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러 가는 길이었는데, 위로 올라가는 길과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있었다. 그중 나는 위로 올라가는 길을 택했다. 그랬더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있었다(쓰다 보니 하루키의 소설 『1Q84』가 떠오른다). 그곳에서 친구를 만났다. 미래에서 온 나는 그의 '현재'를 알고 있었다.       


  현재 그의 가족이 몹시 아프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공동육아를 할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제 만난 꿈속에서는 그는 자기 가족이 아프다는 현실 상황을 모르는 것이다. 나는 친구에게 미래에서 왔다고 말하고, "미래에도 지금처럼 아주 좋다."라고 말해줬다. 꿈속에서는 그게 아주 당연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내가, 그의 환한 표정이 아리면서도 좋았다.      

   아침에 깨고 나니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왜 이런 꿈을 꾼 것일까? 왜 나는 모든 것을 알면서도 '괜찮다'라고 말해줬을까? "      

  그건 아마도, 앨리스 먼로의 소설을 읽다가 잠들었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앨리스 먼로의 단편들은 삶이 점점이 이어져 있다는 걸 보여준다. 점과 점 사이에 수많은 모순과 이해 못 할 일이 벌어지지만 우리는 다음 점으로 이어지는 길을 걸어갈 뿐이다. 먼로는 아주 작은 하나의 사건이 그 점을 이어주기도 하고, 멀어지게도 한다는 걸 담담하게 보여준다. 먼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특별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그 시절, 작은 마을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이 가지는 내밀한 감정을 서늘하지만 따뜻하게 바라보고, 그 마음을 글로 옮긴다. 그래서 나는 먼로의 글을 읽다가 '살다 보면 그렇게 될' 수 있다.라는 그 무엇보다 설득력 있는 위로를 받았다.      

 사람들은 어떤 생각들을 하지만 그것들은 이내 사라진다. 살다 보면 그렇게 된다. 
- 앨리스 먼로, '밤' 『디어 라이프』 (문학동네, 2012)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내가 꿈에서 친구에게 위로를 전한 건. 살다 보면 어느 날 '그렇게 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괜찮다'라고. 

  그렇게 그와 나를, 이 잔인하지만 아름답기도 한 이 삶을 어루만지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단어장을 책갈피로 쓰면서 사이에 끼워둔다. 그리고 좋은 문장이 나오면 필사한다. 그 단어장에 문장이 다 담기면 고리로 해서 모아두고, 빈 단어장을 다시 꺼낸다. 그런데 앨리스 먼로의 글은 거의 필사하지 않았다. 딱 이 문장이다 싶은 것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문장이, 모든 내용이 좋았다. 하나의 문장이 아니라 전체가 하나로 모였을 때 빛이 났다. 명확한 주제나 자극적인 스토리도 없다. 정확하지는 않지, 김영하 작가가 이런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다. 자기가 쓰고 싶은 소설은 필사를 한 문장도 할 게 없는데 책을 다 덮고 나니 '너무 좋다.'라고 느끼는 책이라고. 나에게는 이 책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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