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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작 Feb 10. 2021

집은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어.

전고운 감독, <소공녀> ㅣ 


  라디오를 듣는데 한 성악가가 본인은 '자발적 홈리스'라고 했다. 트렁크에 아주 기본적인 것들만 가지고 다닌단다. 초청 공연을 받으면 그쪽에서 숙소를 해주는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 에어비앤비나 혹은 호텔 등을 다니며 생활한다고 했다. 그녀는 생각보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게 많지 않다며, 먹는 것은 먹어 없어지는 것이니 아주 기본적인 것만 챙기면 된다고 말했다. 그 발상이 아주 신선했으나, 가진 자이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 <소공녀>의 미소도 나름(?) 자발적 홈리스다. 그러나 이때의 자발성은 앞선 성악가의 그것과는 다르다. 미소는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다. 전문적인 능력을 가진 가사도우미이지만, 일당은 정해져 있다. 그러나 월세도 오르고 담뱃값도 오른다. 마지막에는 위스키 값도 오른다. 미소의 우선순위는 담배, 위스키 그리고 남자친구다. 적자 가계부를 쓰던 그녀는 말한다.      



집은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어.
-전고운 감독, <소공녀> 



  '집은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는 미소는 결국, 집을 포기한다. 이를 자발 혹은 선택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폐가 있다. 생존을 위한 우선순위의 문제다. 미소의 생존에서 ‘생각과 취향’은 ‘집’보다 우선한다. 

집이 사라진 그녀는 친했던 다섯 친구를 찾아 (그의 표현 그대로) 여행을 떠난다. 친구들은 각자의 우선순위대로 현실 속에서 버티며 산다.      

  미소의 방문으로 친구들의 일상에 작은 균열이 일어난다. 멈추거나 깨지는 일은 없지만, 그동안 보지 못했던, 혹은 외면해왔던 ‘이야기’들이 드러난다. 미소는 가만히 그들의 삶에 잠깐 들어갔다가 나온다. 현실적인 판타지다. 영화를 보던 나는, 나의 모습을 그 친구들에게서 본다.


  모든 캐릭터가 인상적이지만, 20년 장기 대출로 산 집의 골방에 갇힌 ‘대용’의 이야기가 가슴에 남는다. 현대인의 상징 같다. 대용의 집은 겉보기에는 평범하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전혀 다르다. 대용은 쓰레기장 같은 집의 가장자리에 앉아, 떠나간 아내를 생각하며 술 마시다 울다 하며 시간을 보낸다. 타인의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다. 그러나 아침이면 양복을 입고 멀쩡한 얼굴로 출근한다. 그렇게 버는 돈이 한 달 190만 원. 그러나 그중 100만 원이 집의 원금과 이자를 갚기 위해 나간다.        




<소공녀> 포스터

                                                 


  특정한 주거지가 없다는 것. '집'이라는 단단한 물리적 공간이 없다는 것. 그런데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대단한 내면의 힘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인간은 생각보다 강하지 않고, 그럴 때 사람을 간신히 버티게 해주는 건 '물질'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물질에 집착하고, 매달리는 건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물질이 가지는 한계 역시 안다. 물질의 위로는 얕고 가볍다. 결국, 어느 순간 본질적인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그럴 때는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 미소와 친구들의 삶은 그 ‘선택’을 보여준다. 미소의 선택은 친구들의, 그러니까 우리의 그것과는 다르다. 계속해서 나아간다. 답은 없지만, 오롯이 자신을 자신에게 해 주는 '생각과 취향'을 버리지 않는다. 그 결과로 백발이 되고, 아주 작은 텐트가 나를 보호해 주는 전부일지라도 말이다. 


  책이든, 영화든 보고 나면 질문이 생기는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내게 <소공녀>는 그랬다. 영화 속에는 다양한 삶의 방식이 나온다. 다 그 나름의 이유가 있고, 납득이 된다. ‘잘산다. 못산다. 친구보다 미소의 삶이 더 가치가 있어.’ 같은 판단을 할 수 없다. 각자의 방식일 뿐, 우열은 없다. 미소의 여행과 만남들은 내게 질문을 던진다. ‘다른 누구 말고, 너의 삶은 어때? 너의 생각과 취향은 뭐야?’라고. 잠시 머뭇거리며 생각해보지만 바로 답하기가 어렵다. 아마 평생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답을 찾는 방법은 안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영화를 보던 패드를 덮고, 책을 편다. 읽는다. 쓴다. 영화 <소공녀>가 던진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 나는 오늘도 나만의 방법으로 읽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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