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 『아침의 피아노』(ft.4월 16일의 안산)
다시 4월의 봄이다. 안산 화랑유원지를 걸었다. 호수가 반짝였다. 공기는 생각보다 차가웠다. 아이들은 줄넘기를 가지고 싸우다가 장난치다 이내 깔깔거렸다. 꽃은 많이 졌다. 꽃잎이 진 자리에는 초록이 드문드문 보였다. 지금은 지금대로 아름답지만, 지난주만 해도 이 공원은 정말 환했을 것이다. 벚꽃이 빛을 불러들이고, 빛은 등불처럼 달렸을 것이다. 지금 내가 보는 이 공원의 봄이 찬란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호숫가에 자리한 경기도 미술관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벌써 운영 시간이 끝나있었다. 대신 앞에 있는 카페에 앉았다. 호수와 미술관 사이에 자리한 커피숍은 아늑했다. 노트북을 펴고 무언가를 쓰는 사람들 한 테이블,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이 한 테이블, 연인들이 한 테이블. 총 세 테이블이 있었다. 우리는 중앙에 자리를 잡고, 각자 음료수를 시켰다. 아이들은 핸드폰을 켜고 게임을 하고, 남편은 노트북을 꺼냈다. 그리고 나는 김진영 철학자의 『아침의 피아노』를 꺼냈다. 사실 다른 책을 들고 오려다가 이 책으로 변경했다. 책 표지 앞에 쓰인 아포리즘이 나를 당겼기 때문이다.
"슬퍼할 필요 없다. 슬픔은 이럴 때 쓰는 것이 아니다."
-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한겨레출판, 2018)
슬픔이란 말은, 광활하다. 깊다. 오늘은 이 단어를 꺼내고 싶지 않다. 너무 얕아서, 나의 이 감정이 너무나 얕아서 부끄럽기 때문이다. 대신 4월 16일이 되면 안산으로 온다. 기다리는 이도 없고, 반기는 이도 없지만 매년 오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천천히 산책한다. 작년에는 못 왔다. 재작년에는 여기서 배드민턴을 쳤다. 그 전해에는 공연을 봤고, 팔찌 만들기 체험도 했다. 노란 풍선도 받았다. 아이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저녁에는 예매한 공연을 봤다. 4월 연극제라고 4월 한 달간, 매주 무료 연극을 하고 있다. 날짜만 보고 예매했는데, 매주 다른 연극을 하는 건 몰랐다. 공연이 너무 재미있고, 연기나 구성의 완성도가 너무 높아서 놀랐다. 4.16 재단이 주최라, 연극 내용도 보질 않고 지레짐작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랐다. 원래 각기 다른 극단에서 하는 완성도 높은 좋은 공연을 선정해서 올리고 있었다. 의상이나 소품에서 노란 리본이 보였다. 일상에서 기억하기와 다르지 않았다.
공연을 보고 돌아오는 길, 아이는 챙겨 온 노란 리본을 가방에 달았다. 우리의 대화 사이로 유족의 슬픔에 대해서, 그 텅 빈 마음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왔다 나갔다. 그렇게 집으로, 우리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아주 가끔, 문득 생각할 것이다. 아이도, 나도 그럴 것이다. 그렇더라도, 어제 안산을 다녀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말로 할 수 없지만, 잠깐 함께 머물 수는 있으니까.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나는 타인의 선의를 믿고 싶다. 세상이 그래도 조금씩 나아진다고 믿고 싶다. 내가 생각하는 '세상의 선의'를 믿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내가 최대한 이 세상에 선의를 가지는 것이다. 날 선 목소리를 내는 소수의 사람이 가시 돋친 말을 마구 떠들지만, 사실은 대다수의 사람은 선의를 가지고 있다. 함께 슬퍼하고 있다. 표현하든 그렇지 않든 그렇다. 그게 진실이다. 나는 그걸 믿고, 아이를 키운다. 그래서 슬픔이라는 말을 감히 내뱉을 수는 없지만, 산책하고, 차 마시고, 배드민턴 하고, 줄넘기하는 나만의 방법으로 함께 슬퍼한다.
"함께 슬퍼한다는 것, 그것은 반드시 함께 메마르는 것만은 아니다. 그건 그 슬픔의 크기만큼이나 풍성하게 열매를 맺는 일이기도 하다."
-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한겨레출판, 2018)
정말 그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