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감사일기

읽히지 않는 날에도 삶은 읽힌다

오늘은 삶이 나를 읽었다

by 마음 자서전


오늘은 구립도서관에 갔다.

반납할 책을 내려놓고, 새로운 책 한 권을 품에 안았다.

《보이지 않는 것에 의미가 있다》라는 제목이

오늘의 나를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정신과 의사가 영화를 통해 마음을 들여다본 기록이라 했다.

이미 여러 권의 책으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말을 걸어온 저자의 글답게

문장은 친절했고, 어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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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따라 글자들이 제자리에 머물러 주지 않았다.

줄 위에서 춤을 추고, 바람에 흩날리듯 시야를 벗어났다.

많이 읽지 못한 채 책을 덮었다.

이상하게도 머리보다 마음이 먼저 지쳐 있던 날이었다.

읽히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컨디션과 존재의 리듬이라는 것을 나는 노년에 들어서서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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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도 다시 도서관에 갔다. 의자를 바꾸고, 자세를 고쳐 앉아 보았다.

예전 같으면 ‘이 정도면 읽혀야 한다’며 스스로를 몰아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이런 날도 있지.”

이 말은 체념이 아니라 오늘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문장이었다.

그래도 한 Chapter는 읽었다. 많지 않아도 충분했다.

읽지 못한 부분보다 읽은 만큼에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이

이제는 삶의 지혜처럼 느껴진다.


집으로 돌아와 영화를 틀었다.

<F1 더 뮤비>.

속도를 다루는 영화였지만, 내 눈은 속도에 머물지 않았다.

인물의 얼굴, 말 사이의 침묵, 장면과 장면 사이에 숨겨진 메타포에 오래 머물렀다.

젊은 날에는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들이 중요했지만,

지금은 그사이에 놓인 멈춤과 망설임이 더 많은 말을 건다.

소니와 조슈아 사이의 팽팽한 신경전,

말보다 눈빛이 먼저 의미를 드러내던 순간들.

코인세탁소에서 소니와 루벤이 만나

소니는 샤워를 하며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화를 이어가던 장면.

물소리와 말소리가 겹치며

두 사람의 거리는

말없이도 가까워지고 있었다.

관계란

같은 말을 나누는 일이 아니라

같은 시간에 머무는 일임을

그 장면은 조용히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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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장에서

조슈아와 기자가 소니를 향해 던지는 말과 태도,

그 앞에서 소니가 선택한 대응 역시 오래 남았다.

분노로 맞서기보다 자기 자리를 지키는 태도.

이제는 나도 안다.

모든 싸움에 응답하지 않아도 존엄은 지켜질 수 있다는 것을.

책은 잘 읽히지 않았지만, 영화는 나를 깊이 데려갔다.

오늘은 활자로 마음을 읽는 날이 아니라

장면과 침묵으로 사람을 이해하는 날이었는지도 모른다.

삶은 언제나

한 가지 방식으로만 의미를 건네지 않는다.

읽히지 않는 하루도,

집중하지 못한 오후도,

대신 다른 길로 나를 이끈 이 저녁도

모두 감사하다.


오늘의 나는

속도를 내지 않아도 괜찮았고,

페이지를 많이 넘기지 않아도

삶은 여전히

나를 읽고 있었으니.

그 사실을 알게 해준 하루여서

오늘의 나에게 고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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