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요일의 기록》
《모든 요일의 기록》 (김만철, 북라이프, 2015, 20180407)
《책은 도끼다》의 저자 박웅현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광고 카피라이터이다. 15년째 박웅현 CCO팀에서 일하고 있다. 저자가 쓴 《모든 요일의 여행》도 있다. 김만철이란 남자이름이지만 엄연한 여자다. 기억력이 나빠 모든 것을 기록하였다고 한다. 그런 기록을 엮어 이 책을 만들었다. 그는 모든 행동에서 카피를 생각해낸다. 책에서, 여행에서, 음악에서, 어머니의 잔소리에서, 샤워 중에 잡생각에서도 아이디어가 나온다.
책의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때의 나는 기억한다. 사람은 안 변한다지만 이 책들 덕분에 잠깐 동안이라도 변했던 나는 기억한다. 그게 내가 책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일 것이다. 18
모든 독서는 기본적으로 오독(誤讀)이지 않을까? 그리고 그 오독의 순간도 나에겐 소중할 수밖에 없다. 그 순간 그 책은 나와 교감했다는 이야기니까, 나를 위로했든,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두었든, 그 책의 임무는 그때 끝난 거다. 40
도넛으로 태어난 사람이 있고, 검은 건반으로 태어난 사람이 있는 법이다. 칠판으로 태어난 사람이 있고, 스피커로 태어난 사람이 있고, 계산기로 태어난 사람이 있는 법이다. 도마로, 붓으로, 자동차로, 전화기로, 옷으로 태어난 사람도 있는 법이다. 없으란 법이 어디 있는가? 옅은 파마약 냄새가 평생 따라다닌 사람도 있을 것이고, 분가루를 얼굴에 바르는 것처럼 밀가루를 옅게 온몸에 붙이고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건 본인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냥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다. 도망칠 수도 없다. 아빠처럼은 살지 않을 거라고 젊은 시절 내내 소리를 질렀지만 어느새 거울을 보면 아빠와 똑닮은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냥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66
나의 임무는, 지금, 이곳이다. 내 일상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 그리하여 이 일상을 무화시켜버리지 않는 것, 그것이 나의 임무이다. 75
60이 되고 싶었다. 그게 꿈이었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저 늙어가는 것이 꿈이 될 수 있는 건가, 그냥 늙고 싶은 건가, 그건 아니지 않는가, 60살이 된 내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보았다. 고요한 얼굴이고 싶었다. 세상의 어떤 풍파도 감히 박살낼 수 없는 깊고 따뜻한 얼굴이고 싶었다. 그렇다면 그저 늙는 것이 아니라 잘 늙어야 했다. 그때면 얼굴에 모든 것이 새겨져 있을 텐데, 지금까지의 시간과 만남과 선택과 마음이 모두 새겨져 있을 텐데, 그 얼굴에 책임을 지고 싶었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괜찮은 인생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잘 늙고 싶다는 것도 꿈으로서 쾌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181
나는 내가 비옥한 토양을 가진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여기에서 어떤 나무가 자랄지는 모르겠지만, 그 나무가 튼튼했으면,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물론 이미 카피라이터라는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그 나무를 튼튼하게 키우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그 나무가 나의 마지막 나무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 법이니까, 또 어떤 나무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그 나무를 키우기로 한다면 잘 키우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리미리 비옥한 토양을 가꿔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열심히 키웠는데도 아무 나무도 안 자란다면? 그 역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내게 비옥한 토양은 남을 테니까, 그 토양을 가꾸는 과정에서 나는 충분히 행복할 테니까, 그 토양을 가지고 있다면 도대체 행복하지 않을 도리가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나는 뭔가를 한다. 새로운 것을 경험한다. 새로운 것을 배운다. 그리고 행복해한다. 비옥한 토양의 주인이 되어 비옥한 웃음을 짓는다. 나는 알고 있다. 그 땅엔 이미 ‘나’라는 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것을, 그 나무가 행복하게 자랐으면 좋겠다. 그 이상을 바란 적은 없다. 그것만으로도 차고 넘친다.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