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선의가 모여 큰 마음이 될 때

by 온시

일하느라 한참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다.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핸드폰을 열었더니 여동생에게 부재중 전화와 카톡 메시지가 여러 개 와 있다. 근무 중이라는 것을 알기에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는 전화하지 않았을 텐데… 얼른 카톡부터 열었다.

호아가 교복을 입고 등교해야 하는 날인데 교복을 안 입고 갔다고 여동생에게 전화한 모양이다. 평소 이런 일에는 융통성도 없고 판단력도 부족한 호아가 어떻게 일하느라 바쁜 엄마가 아닌 이모에게 전화할 생각을 했을까.

여동생은 그 즉시 교복을 찾으러 우리집을 방문했다. 교복의 위치를 묻느라 나에게 전화를 했고, 교복을 찾아 호아에게 잘 전달했다는 내용의 메시지가 이어졌고, 마지막은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고양이 앵두의 사진 몇 장이었다. 아주 잘 놀고 있는 것 같다는 메시지와 함께. 호아와 나는 여동생 덕분에 한 차례 위기를 또 넘겼다.


퇴근 시각이 가까워지자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온시, 오늘 저녁 뭐 먹니?”

“호아랑 그냥 대충 먹어야죠.”

“엄마 집에 와서 밥 먹어라. 엄마 제육볶음 하고 있다.”

엄마는 요즘 치과며, 정형외과며 병원 순례를 하느라 오후 시간이 늘 분주한데 오늘은 어떤 병원도 가지 않아 모처럼 여유 있다고 하셨다.

“호아가 간다고 하려나 모르겠어요. 학원도 금방 가야 되고.”

“꼬셔 봐~ 그때 김치 담그고 남은 황금배추도 있는데, 그거에 싸 먹으면 얼마나 맛있게~”

줄기가 은은하게 노오란 황금배추를 떠올리니 군침이 돌았다.


나의 저녁 시간은 보통 퇴근하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헐레벌떡 저녁 준비를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호아가 학원을 가기 전에 저녁을 먹여 보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지만 후닥닥 저녁 전쟁을 치르고 나면 그제야 넋이 나가고 몸에 힘이 쭈욱 빠지는 것이 일상이다. 그런데 엄마 집밥이라니. 맛있고도 즉각적인 엄마 집밥이라니. 나는 엄마 집밥에 당장이라도 “네!!” 대답하고 싶었지만 호아랑 이야기해 본다고 말씀드리고 전화를 끊었다. “네!!” 했다가 호아가 안 간다고 하면 엄마가 대단히 실망하실 것을 알고 있다.


호아에게 전화를 걸어 의사를 물었다.

“호아야, 할머니가 할머니집에서 밥 먹자는데 어때?“

“엥……”

“싫어?”

“..... 알았어!”

애써 밝게 알았다고 대답했지만 딱히 내켜하지 않는 호아의 마음을 잘 알았다. 내키지 않지만 엄마 마음, 할머니 마음을 순간적으로 헤아리고 “알았어!”라고 했다는 것 또한 잘 알았다. 엄마집과 우리집은 아주 가까운 거리이지만 바쁜 시간에도 할머니집 가자는 제안을 흔쾌히 수락해 준 호아가 고마워 운전해서 갔다.


엄마 집 현관문을 열기도 전에 매콤달콤한 제육볶음 향기가 진동한다. 배추에 밥을 올리고, 고기를 올리고, 엄마표 쌈장까지 올려 와구와구 밥을 먹었다. 내가 맛있게 밥을 먹는 모습만 봐도 마음이 아려 오는 엄마의 물기 어린 시선이 나에게 고정되어 있다.

“고기는 언제 먹어도 왜 이렇게 맛있지?”

“니가 배곯아서 그렇다. 잘 챙겨 먹어야 하는데 최 서방도 없고 하니까 너가 밥을 대충 챙겨 먹어서 그래. 그럴수록 고기를 든든하게 먹고 배를 채워야 하는데.”

21세기에, 배곯는 여자가 바로 나다. 물론 어디까지나 물기 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엄마만의 생각이다. 이렇게 오동포동 여전히 성장하고 있는 40대 아줌마가 배를 곯았다니 가당키나 한 말인가.

호아는 오늘도 아빠가 몇 날 며칠을 곱씹고 행복해할 몇 마디를 남긴다. “할아버지가 우리 가족 중에 제일 재밌어요.” 같은.


밥은 든든히 얻어먹고, 뒷정리도 못 도와드리고 엄마 집을 나섰다. 호아를 학원에 바래다 주려다 보니 시간이 빠듯했다. 호아 학원 앞 교통이 늘 혼잡해서 정차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은데 오늘은 마침 한산하다. 호아가 학원에 들어가는 것까지 여유 있게 지켜볼 수 있었다.



집에 들어갔는데 집안 구석구석이 너무나 깨끗하다. 아무래도 우렁각시가 다녀갔나 보다. 우리집 우렁각시는 엄마일 때도 있고, 여동생일 때도 있는데 오늘은 여동생이다. 책 수십 권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던 책상도, 싱크대에 대충 던져둔 아침 먹은 그릇들도, 몸만 쏙 빠져나왔던 침대도… 모두 단정하다. 고마움을 넘어서 감동이다.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고마움을 전했다.

“언니는 그렇게 책이 좋아? 온 사방이 다 책이야”

하는 핀잔 아닌 핀잔과,

“언니 집에 맛있는 거 많길래 다 하나씩 갖고 왔다.”

하며 키득거리는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 들렸다. “완전 잘했다.” 그렇지 않아도 간식들이 자꾸 쌓여 서 나눠 먹고 싶었는데 주중에 여동생네 들를 여유가 없어 아쉬웠다.



나는 여유 있게 샤워를 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 있고, 오랜만에 텔레비전을 켰다. 마침 영화채널에서 <외계+인 2부>가 방송 중이다. 이 영화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다. OTT 사이트에서 영화를 검색해 보는 것도 물론 가능하지만 텔레비전을 켰을 때 우연히 좋아하는 것이 방영될 때의 반가움은 특별하다. 라디오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오면 왠지 특별히 더 좋게 들리는 것처럼.

영화를 보고 있으니 어디선가 나타난 앵두가 내 배 위로 가볍게 올라와 앉는다. 평소에는 코를 한 번 부딪히고 다시 내려가는데 오늘은 내 배 위에서 동그랗게 몸을 말고 엎드린다. 앵두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오. 오늘의 이 행복은 참으로 대단했다. 작은 선의들이 모여 큰 마음이 되었다. 그것들이 온전한 모양으로 나에게 와 안겼다.



앵두가 고롱대는 소리가 점차 작아지고, 앵두와 맞댄 배가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