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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활발한골방지기 May 29. 2023

우리는 뭐, 대단해요?

SNS를 하다 보면 늘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휴대폰을 앞에다 두고 남편과 싸우면 그날 저녁이나 다음 날에는 

'부부는 감정으로 이루어진 관계'라는 동영상이나 글귀가 보이고

아이 관련해서 이야기를 하면 

'아이에게 감정코칭 하는 법'이라는 말도 안 되게 

필요하다 싶은 것들에 관한 것들이 좌르륵 나온다.


휴대폰이, SNS가 항상 내 생활 소음을 듣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도,

드라마를 보며 슬피 울 때도,

지인들과 대화를 할 때도.


이미 휴대폰 중독에 되어버린 몸을 거부하고자

억지로라도 책을 집어드는 이유다.

물론, 책을 읽는 것이 좋고 억지로 하는 이유도 몇 가지는 된다.


아이가 책과 가까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

한껏 날이 서 있는 나에게 주는 신경 안정제 같은 물건이고

그리고 나는 아직까지 아날로그가 좋다.


e-book을 보기는 하지만 도서관에 없는 책을 볼 때나

운동할 때 읽어주는 겸용으로만 사용한다.


또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네.


다시 SNS로 돌아가자면 심심찮게 말을 뱉어내어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 죄책감 가지게 하는 글귀들을 종종 보곤 한다.


이런 글귀를 봤다.


"아이 감정에 공감하고 계신가요?"

"단순히 '아~ 그랬구나~'라고 하기보다는 정말로 아이의 짜증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글을 읽은 무수한 사람들 중 몇몇은 


'나는 전혀 그런 마음이 안 들었는데 나는 나쁜 엄마/아빠야. 아이의 짜증을 보고 매번 알면서도 짜증으로 맞받아 치는 나는 정말 아이를 키울 자격이 될까?'


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을지 안타까울 지경이다.


솔직히 아이의 모든 감정을 공감하고 싶지만 잘 되진 않는다.

그날의 상황, 기분에 따라 나도 짜증을 내고 싶을 때도 있고

인내심이 부처님보다 깊어질 때도 있다.

어떻게 늘 똑같이 기계처럼 온화하게 아이를 대할 수 있을까.


하다못해 드라마나 영화 같은데에서 신적인 존재들도 짜증을 내고 인간에게 화풀이를 해대는데, 아이에게 짜증을 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분들을 보면 나는 정말 진심으로 존경하고 존경한다. 




아이는 한 번에 고쳐지지 않는다.
아이는 감정 컨트롤을 부모에게 배우고 있다.
아이는 돌아서면 잊는다.


하지만 나는 이 '아이'를 '인간'으로 바꾸고 싶다.

꼭 아이만 저 모습일까?


성인이 된 나 또한 -

고치고자 하는 습관은 한 번에 고쳐지지 않고
감정 컨트롤은 살아온 내내 진행 중이지만 아직도 배우고 있고
돌아서면 잊고 실수와 후회를 반복한다.


차이점이 있다면 

빨리 알아차리냐는 점과

아이처럼 처음이냐, 성인처럼 경험에 축적됐냐는 점이다.



아이를 '미성숙'의 존재로 칭하는데 

사실 그냥 인간 자체가 '미성숙'의 존재다.

나는 사회와 심리학에서 '미성숙'하다고 칭하는 아이에게서도 충분히 위로를 받고 삶의 원동력을 얻기도 한다.


감히 말하자면 인간은 절대로 '성숙'해 질 수 없는 동물이라 생각하고, 인간을 반으로 쪼개자면 '실천하는 이'와 '실천하지 않는 이'로 나누어질 수 있겠다. 

아이를 키우면 심호흡을 저절로 배우게 되고 사회에서 진상을 만나면 어떻게든 나 자신이 상처받지 않는 쪽으로 끝내고 싶어 하듯이 

이 모든 것들이 성숙으로 향하는 길목 중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포함한 모든 인간은.

그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열심히 자신의 실수와 과오를 갈고닦는 존재가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보다 대단하지도, 너 낫지도 않다. 

마음으로만 보자면 우리도 '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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