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 셋,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기꺼운 독서에세이

by 기꺼움


한강 3장 일곱 개의 뺨 (소년이 온다, 창비, 2014)을 읽고 쓰다.




3장 일곱 개의 뺨



도청 복도에서 동그란 눈을 크게 뜨며 동호의 질문에 답해주던 은숙의 이야기다. 생기를 잃어버린 은숙의 파리한 얼굴이 상상 속에서 불쑥불쑥 떠올랐다.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는 그녀는 수배된 번역가를 만났다는 이유로 형사에게 끌려가 추궁당하고, 일곱 대의 뺨을 맞는다. 그리고 그것을 잊기 위해 애쓰는 각각의 하루를 담아내며 소설은 전개된다. 1980년 광주 이후로 오 년 여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광주의 진실이 서서히 알려지면서 민주화의 열망은 거세지고, 그만큼의 크기로 당국의 탄압도 극에 달하는 시절이었다. 은숙은 그 시간을 버겁게 통과하고 있었다.

학살자 전두환을 타도하라. 뜨거운 면도날로 가슴에 새겨놓은 것 같은 문장을 생각하며 그녀는 회벽에 붙은 대통령 사진을 올려다본다. 얼굴은 어떻게 내면을 숨기는가, 그녀는 생각한다. 어떻게 무감각을, 잔인성을, 살인을 숨기는가. (77쪽)



은숙의 영혼은 부서졌다. 늙고 죽는 것이 두렵지 않은 무감각한 일상은 무채색에 가깝다. 빛이 사라진 어둠 속에서 가까스로 살아가는 그녀의 삶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 “사람들은 그녀가 사랑스럽기를 기대했다.”(85쪽) 어쩌면 나 역시 그랬다.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면 다행스러운 게 아닌가, 그렇다면 잊고 살아야지,라고 생각했다. 겪지 않은 고통을 가늠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허기가 주는 치욕을 알지 못한다면 결코 그녀에게 닿을 수 없다.

묵묵히 쌀알을 씹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치욕스러운 데가 있다, 먹는다는 것엔. 익숙한 치욕 속에서 그녀는 죽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배가 고프지 않을 것이다, 삶이 없으니까. 그러나 그녀에게는 삶이 있었고 배가 고팠다. (85쪽)



출판물에도 검열이 철저했던 시기, 은숙이 몇 번을 교정했던 희곡집의 문장 절 반 이상이 먹줄로 그어져서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 어렵게 된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그녀의 손에 들린 연극 초대권. 무대 위에서 소리 내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며 대사를 하는 배우들의 모습이 처연하다. 1980년 광주를 끝까지 기억하려는 이들의 울음은 멈추지 않는다. 은숙이 일곱 번째 뺨을 잊을 날이 오지 않을 것처럼.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수 병에 네가 꽂은 양초 불꽃들이. (102~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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