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 넷,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기꺼운 독서에세이

by 기꺼움


한강 「4장 쇠와 피 (소년이 온다, 창비, 2014)을 읽고 쓰다.




4장 쇠와 피



무차별적으로 날아든 총알이 끝이 아니었다. 살아서 수감된 사람들의 겪은 고통은 잔인하고, 무자비하다. 모나미 볼펜에 통증이 어른거린다. 책을 읽기 전에 무심코 지나쳤던 볼펜에 고통스러운 이야기가 담긴다. 인간으로서 주체성을 상실하고, 그저 견뎌야 했던 끔찍한 고문의 시간을 회고하는 챕터다. 사람이 사람을 이토록 잔인한 방식으로 괴롭히기 위해서는 대체 어떤 명분을 가져야 하는지.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인지. 답 없는 질문을 끊임없이 곱씹었다.

평범한 볼펜이었습니다. 모나미 검정 볼펜. 그걸 손가락 사이에 교차시켜 끼우게 했습니다. (···)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뼈가 드러났으니 그 자리는 이제 그만할 거라고. 그렇지 않았습니다. 더 고통스러울 걸 알고, 약솜을 뺀 다음 더 깊게 볼펜을 끼우고 짓이겼습니다.(104~105쪽)



어깨에 총을 메고 끝까지 도청에 남아 있었던 진수에 관한 이야기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와 도청에 남았고, 한 조로 수감 생활을 했던 이름 없는 자의 인터뷰이다. 진수는 스스로 죽음을 택했고, 인터뷰이는 살아 있다. 죽음과 삶의 경계가 희미하다. 죽음을 유예한 삶에 불과하기 때문일까? 지나간 어제가 아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1980년 광주는 생생하게 숨 쉬는 오늘이었다.

지금도 나는 여름을 견디지 못합니다. 벌레 같은 땀이 스멀스멀 가슴팍과 등으로 흘러내리면, 내가 살덩어리였던 순간들의 기억이 고스란히 돌아와 있는 걸 느끼며 깊은 숨을 쉽니다. 이를 악물고 더 깊은 숨을 쉽니다.(120~121쪽)



동호를 포함한 다섯 명의 어린 학생들이 총을 맞는 순간을 묘사한 문장에서는 참기 힘든 분노가 차오르는데, 슬픔을 뛰어넘는 그 감정은 총을 쏜 장교의 잔인하고, 비열한 태도가 만들어 낸 것이었다. “망설이지 않고 학생들에게 총을 갈겼습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봤습니다. 씨팔, 존나 영화 같지 않냐. 치열이 고른 이를 드러내며 그가 부하를 향해 말했습니다.”(133쪽) 그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의 삶이 지옥이 아니라면 어디가 지옥일까. 살아남은 자의 치욕을 더 이상 모른척하기 어려웠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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