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 다섯, 이전으로 돌아갈 길은 끊어졌다

기꺼운 독서에세이

by 기꺼움


한강 「5장 밤의 눈동자 (소년이 온다, 창비, 2014)을 읽고 쓰다.




5장 밤의 눈동자



달은 밤의 눈동자라는 말이 무서웠던 임선주의 이야기다. 도청에서 동호에게 “오늘만 우리 도와줄래?”라고 말했던 연두색 티셔츠를 입은 누나. 1980년 광주로부터는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고, 이제 마흔이 넘은 그녀는 어느 환경 단체에서 일하고 있다. 화자는 선주를 ‘당신’이라고 칭하는 목소리이다. 그 목소리는 19:00부터 05:00시까지 시간 순으로 그녀의 걸음과 생각을 따라가는 형식을 택한다. 사무실에 도착한 휴대용 녹음기와 테이프를 앞에 두고 선주는 기억을 끄집어낸다. 선주에게 시민군 활동에 대해 증언해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던 윤(광주 사건을 단행본으로 엮으려는 작가)이 직접 만날 수 없다면 증언 내용을 녹음해서 보내달라고 거듭 부탁했던 것이다. 증언이라는 정의로운 목적이 오히려 그녀의 상처를 덧나게 하는 것만 같아 위태롭다. 할 수 있을까?

당신은 녹음 버튼을 누르지 않는다. 휴대용 녹음기의 반들반들한 플라스틱 모서리를, 마치 흠집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 신중하게 손끝으로 더듬는다.(142쪽)



선주에게 또 다른 숙제가 있다. 여공으로 일하던 어린 시절에 함께 했던 성희 언니의 병문안을 가는 것이다. 병원으로 향하며 선주는 떠올렸다. 여공들에게 노동법을 가르쳤던 성희 언니의 모습을, 수십 명의 노조원들이 중무장한 경찰들에게 맞으며 끌려가는 장면을, 선주 역시 사복 경찰에게 배를 밟혀 장 파열 진단을 받았던 순간을. 이후 공장을 떠난 스물한 살 선주는 광주에서 미싱사가 되었지만, 시절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수십만의 군중이 광장으로 모여들던 그날을 시작으로 마지막까지 도청에 남았다가 보안부대로 끌려가게 되고, 그곳에서 겪었던 형언할 수 없는 고문까지 곱씹는다. 결코 지워지지 않는 기억을 끝내 말할 수 없었던 선주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성희, 둘 사이에 해묵은 갈등도 서서히 드러난다. 만날 수 있을까?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니,라고 묻던 성희 언니의 침착한 목소리를 당신은 기억한다. 무슨 권리로 내 이야길 사람들에게 하는 거야,라고 당신이 이를 악물며 물었을 때였다. 이어 대답하던 성희 언니의 차분한 얼굴을 당신은 지난 십년 동안 용서하지 않았다. 나라면 너처럼 숨지 않았을 거야.(161~162쪽)



할 수 없었고, 만날 수 없었다. 선주는 녹음기의 버튼을 누르지 못했고, 병원에 누워 있는 성희 언니에게도 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안다. 또다시 그날 광주로 돌아간다고 해도 같은 결정을 내릴 거라는 것을. 끝까지 남겠다고 손을 들게 될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게 선주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지금 선주의 머뭇거림을 쉽게 재단해서는 안 된다. 그녀가 죽는 날까지 증언하지 못하더라도. 끝내 성희 언니를 만나지 못하더라도.


그 여름으로부터 이십여년이 흘렀다. 씨를 말려야 할 빨갱이 연놈들. 그들이 욕설을 뱉으며 당신의 몸에 물을 끼얹던 순간을 등지고 여기까지 왔다. 그 여름 이전으로 돌아갈 길은 끊어졌다. 학살 이전, 고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173~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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