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한 편이다. 불안한 감정도 자주 느낀다. 대체로 불안할 때 책을 읽는 것 같다. 책을 읽다 보면(특히 소설) 현실의 불안에서 조금 벗어나게 된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또 다른 세계 안에 몰입하고 나면 감정적으로 어떤 편안함이나, 개운함을 느낀다. 어려서부터 로맨스 판타지 소설을 주로 읽었던 것도 어쩌면 불안을 달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한다.
쨍하고 맑은 날보다는 비를 살짝 머금은 날이 좋다. 세상을 감각하는 주파수가 비 오는 날씨와 잘 맞는다. 가만히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안정된 기분이 된다. 방안 불빛의 조도가 높을 때보다 낮을 때 여유가 생기는 것과 흡사하다. 여행을 다닐 때 적당히 비가 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 우산을 써도 좋고, 안 써도 좋은 날은 거의 완벽하다.
매운 음식을 선호한다. 매운 주꾸미, 매운 떡볶이, 매콤한 쫄면 등 양념이 된 매운맛도 좋아하지만, 제일은 청양고추를 넣은 매운맛이다. 집 냉장고에는 언제나 청양고추가 구비되어 있다. 된장찌개를 끓이더라도 가족이 먹을 양은 넉넉하게 덜어두고 내가 먹을 찌개에는 청양고추 한 두 개를 썰어 넣는다. 알싸해진 된장찌개 국물에 밥을 비벼먹으면 실패가 없다. 매운맛에 빠져 있으면 잡념에서도 자유롭다.
일기를 쓰려고 노트북을 펼쳤는데 오늘은 정말 쓸 게 없었다. 한참을 멍하니 빈 종이만 바라보고 있다가 "예민한 편이다."라는 첫 문장을 적었다. 사건이 아니라 내 안에서 글감을 찾아 쓰다 보니 불안을 낮추고, 마음이 편해지는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가 된 것 같다. 책과 비와 매운 음식이 있으면 안정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결론이 나오는데, 실제도 얼추 그런 듯하다.
한 가지만 더 보태자면 "시"에 관해서다. 언어가 만들어 내는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 시라고 생각하지만, 잘 읽어내지는 못한다. 시인들이 만들어 낸 문장 안에서 헤매는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시를 오롯이 느끼고 싶다는 염원이 있다. 시에 관한 평론집을 자주 읽고, 필사하는 이유도 그 때문인 것 같다.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 앞에서 정답 해설을 펼치는 것과 비슷하다.
유일하게 외우고 있는 시가 한 편 있는데 그것은 김수영 시인의 『봄밤』이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라고 반복되는 시구는 불안이 극심하거나, 격정에 휘둘리는 어떤 일 앞에서 평점심을 갖게 한다. 흔들리는 마음의지표가 되어 준다. 오늘 새벽 문장으로는 봄밤의 일부를 옮겨둬야겠다. 잘 써지지 않는 글을 여기까지 끌고 온 대견한(?) 나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