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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꺼움 Nov 27. 2019

[오늘, 책] 이제야 언니에게_최진영

어설픈 연민을 가진 방관자의 고백

  최진영* 작가는 『해가 지는 곳으로』라는 소설로 처음 접했었다. 재앙과 죽음,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이야기를 홀리듯 읽었던 기억이 난다.




  얼마 전 출간된 작가의 장편소설『이제야 언니에게』는 성폭행 피해자인 열일곱 제야의 이야기다. 일기 형식으로 쓰인 소설이다. 내밀한 일기에 쏟아내는 제야의 고통과 트라우마를 읽으며 연신 아팠다. 쓰라린 문장에 책장은 더디게 넘어갔다. 성폭행 피해자가 겪는 2차 피해, 무성한 소문들과 갈수록 차가워지는 시선들. 나 역시 방관자이자, 가해자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가 따라간 게 잘못이지." "전혀 피해자 같지가 않네." "남자가 꽃뱀한테 걸린 것 아냐?" 칼날 같은 말들에 반박하지 못했고, 심지어 비슷한 의심을 품으며 동조했던 내가 떠올라 괴로웠다. 당장 제야가 눈앞에 나타나 울분을 토하며, 원망할 것 같았다. 나는 누구도 비난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직 채 피지도 못한 나이. 고통에 짓밟힌 제야의 이야기를 손에서 놓지 못하고 꾸역꾸역 읽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폭력에 민감한 사람이 되고 싶다. 문제를 똑바로 직시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다. 마음 편한 대로 해석하고, 쉽게 예단하는 것으로 폭력의 방관자가 되고 싶지 않다. "잘 몰라서 그랬어."라고 무지한 변명을 내뱉는 사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런 바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내가 지금 누구보다 폭력에 둔감한 사람이란 의미겠지.


  나는 어설픈 연민을 가진 방관자다. 이런 내가 책을 읽으며 조금씩이라도 괜찮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가슴에 깊이 박힌 제야의 문장을 옮겨두며 다시 한번 마음을 잡는다. 타인의 아픔을 모른척하지 않고, 겪어야 할 괴로움 앞에서는 담대해지고 싶다.



다들 그렇다고 말한다. 도둑보다 도둑맞은 내 잘못이 크다고. 네가 도둑맞을 짓을 했다고. 나는 몰랐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몰랐다. 무서웠다. 하지만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는다. 나를 의심하고 내 잘못을 지적한다. 내 인생은 이미 망한 것처럼 말한다. 공부도 잘하고 똑똑한 애가, 사리분별 다 하고 할 말 다 하는 애가 그냥 당하고만 있었다니 말이 되느냐. 요즘 애들이 얼마나 교활하고 약았는데, 울면서 하는 말이라고 다 믿으면 안 된다. 걔가 뭔가 감추는 게 있을 것이다. 그런 소리들, 내가 못 들은 줄 알지.(50쪽)
- 최진영 『이제야 언니에게』(창비, 2019)
                                                  
하지만 네 잘못도 있다고 큰아버지는 말했다. 이 문제가 알려졌으니 손해는 너만 볼 것이라고 큰어머니는 말했다. 할머니는 말했다. 우리 모두 그 비슷한 일 한번씩은 겪고 살았다. 시간 지나면 흐려지고 괜찮아지고 다시 얼굴 보고 살 날이 올 것이다. 너만 대수롭지 않다고 마음먹으면 모두가 편해진다. 여자애가 얌전하고 참한 줄 알았는데 보니까 담배도 하고 술도 하고 그랬다면서. 경찰에서 하는 말이 처녀도 아니었다던데 그럼 누가 먼저 자빠졌는지 자빠트렸는지 알게 뭐냐고 말했다. 교장이라는 인간이.  여자애 혼자서 겁도 없이 그 뒷길로 왜 기어들어가. 애당초 그런 데를 가지 않았으면 없었을 일이지. 잘잘못을 따지자면 끝이 없는 거라고 과수원 고모는 말했다.(85쪽)
- 최진영 『이제야 언니에게』(창비, 2019)


학생 말하고 행동하는 거 보면 전혀 피해자 같지 않아. 피해자 같은 게 뭔데. 그냥 당하고만 있었을 것 같지 않다고. 진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어젯밤에 신고했어야지. 여기서 소리 지를 게 아니라 어젯밤에 그 남자 앞에서 그랬어야지.(116쪽)
 - 최진영 『이제야 언니에게』(창비, 2019)    

                                                                                                                             



* 2006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 장편소설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끝나지 않는 노래』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 『구의 증명』 『해가 지는 곳으로』, 소설집 『팽이』. 신동엽문학상, 한겨레문학상을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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