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연민을 가진 방관자의 고백
다들 그렇다고 말한다. 도둑보다 도둑맞은 내 잘못이 크다고. 네가 도둑맞을 짓을 했다고. 나는 몰랐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몰랐다. 무서웠다. 하지만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는다. 나를 의심하고 내 잘못을 지적한다. 내 인생은 이미 망한 것처럼 말한다. 공부도 잘하고 똑똑한 애가, 사리분별 다 하고 할 말 다 하는 애가 그냥 당하고만 있었다니 말이 되느냐. 요즘 애들이 얼마나 교활하고 약았는데, 울면서 하는 말이라고 다 믿으면 안 된다. 걔가 뭔가 감추는 게 있을 것이다. 그런 소리들, 내가 못 들은 줄 알지.(50쪽)
- 최진영 『이제야 언니에게』(창비, 2019)
하지만 네 잘못도 있다고 큰아버지는 말했다. 이 문제가 알려졌으니 손해는 너만 볼 것이라고 큰어머니는 말했다. 할머니는 말했다. 우리 모두 그 비슷한 일 한번씩은 겪고 살았다. 시간 지나면 흐려지고 괜찮아지고 다시 얼굴 보고 살 날이 올 것이다. 너만 대수롭지 않다고 마음먹으면 모두가 편해진다. 여자애가 얌전하고 참한 줄 알았는데 보니까 담배도 하고 술도 하고 그랬다면서. 경찰에서 하는 말이 처녀도 아니었다던데 그럼 누가 먼저 자빠졌는지 자빠트렸는지 알게 뭐냐고 말했다. 교장이라는 인간이. 여자애 혼자서 겁도 없이 그 뒷길로 왜 기어들어가. 애당초 그런 데를 가지 않았으면 없었을 일이지. 잘잘못을 따지자면 끝이 없는 거라고 과수원 고모는 말했다.(85쪽)
- 최진영 『이제야 언니에게』(창비, 2019)
학생 말하고 행동하는 거 보면 전혀 피해자 같지 않아. 피해자 같은 게 뭔데. 그냥 당하고만 있었을 것 같지 않다고. 진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어젯밤에 신고했어야지. 여기서 소리 지를 게 아니라 어젯밤에 그 남자 앞에서 그랬어야지.(116쪽)
- 최진영 『이제야 언니에게』(창비,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