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입소문이 무섭다
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오만원을 내야 오만원을 돌려받는 거고, 만이천원을 내면 만이천원짜리 축하를 받는 거라고.
이력서에 빼곡했던 내 모든 경력이 전략기획팀으로 가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는데. 내가 일을 못해서 그랬나. 그런데 시켜보지 않고 어떻게 알까. 무엇보다 지금은 같은 부서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 왜 연봉 차이가 이렇게 많이 나야 할까. 구재가 일을 잘해서? 대체 얼마나 잘하길래? 딱 천삼십만원어치만큼?
- 장류진, 「잘 살겠습니다」(『일의 기쁨과 슬픔』 창비, 2019) 27쪽 중에서
회장의 한마디에 정말로 월급이 고스란히 포인트로 적립되어 있었다. 그 커다란 숫자를 보는 순간, 거북이알의 심장께의 무언가가 발밑의 어딘가로 곤두박질쳐지는 것만 같은 모멸감을 느꼈다고 했다.
- 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일의 기쁨과 슬픔』 창비, 2019) 51쪽 중에서
여자를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나온다. 오늘 하루를 당신과 함께해서 즐거웠다는 말과 함께 깍듯하게 인사한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정중한 미소를 보낸다. 당신의 털끝 하나도 건드릴 마음이 없다는 듯 지체하지 않고 돌아선다.
- 장류진,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일의 기쁨과 슬픔』 창비, 2019) 92쪽 중에서
자신이 서고 싶은 위치에 각자 띄엄띄엄 서 있는 관객들을 보며 공연하는 것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장우가 연주하고 부르는 음악이 더 높은 밀도로 한 사람에게 가닿는 모습, 그리고 그걸 받아들인 관객이 고개, 어깨, 손가락의 작은 움직임으로 리듬을 타는 모습이 무대에서 온전히 다 보이는 것도 좋았다. - 장류진, 「다소 낮음」(『일의 기쁨과 슬픔』 창비, 2019) 107~108쪽 중에서
우리 부부는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했다. 나에게 아이는 마치 그랜드 피아노 같은 것이었다. 평생 들어본 적 없는 아주 고귀한 소리가 날 것이다. 그 소리를 한번 들어보면 특유의 아름다움에 매혹될 것이다. 너무 매혹된 나머지 그 소리를 알기 이전의 내가 가엾다는 착각까지 하게 될지 모른다. - 장류진, 「도움의 손길」(『일의 기쁨과 슬픔』 창비, 2019) 142쪽 중에서
여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냉방이었다. 등줄기에는 이미 소름이 돋았고 블라우스도 다시 기분 좋게 펄럭였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똑바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숄더백을 한번 추켜올리고, 한 손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든 채로. 새로 산 구두 굽 소리가 경쾌했다. - 장류진, 「백한번째 이력서와 첫번째 출근길」(『일의 기쁨과 슬픔』 창비, 2019) 164쪽 중에서
새벽의 방문자들은 잊을 만하면 한번씩 찾아왔다. 여자는 초인종이 울릴 때마다 비디오폰에 달린 모니터로 남자들을 관찰했다. 그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별일 아니라고 주문을 거는 듯한 태연함, 남에게 들키기 싫은 일을 할 때의 부끄러움, 돌연 술이 확 깨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의 주저함, 그러면서도 어쨌든 곧 벌어지게 될 눈먼 섹스에 대한 설렘 등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는 얼굴들. - 장류진, 「새벽의 방문자들」(『일의 기쁨과 슬픔』 창비, 2019) 183쪽 중에서
말 그대로 노파심이라는 게 이런 걸까. 사진이 지구 반대편 먼 길을 거쳐가는 동안 행여나 구겨질까, 노인은 많이 걱정했던 것 같다. 나는 시리얼 상자를 가위로 자르고, 그것을 풀로 사진의 뒷면에 단단히 붙이는 노인의 모습을 상상했다. 하얀 밤, 태양이 뭉근한 빛을 내는 창가에 앉아 가위와 풀과 사진 그리고 편지 사이를 천천히 오가며 더듬거리는 노인의 쭈글쭈글한 손을. - 장류진, 「탐페레 공항」(『일의 기쁨과 슬픔』 창비, 2019) 211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