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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꺼움 Nov 20. 2019

[오늘, 책] 일의 기쁨과 슬픔_장류진

역시, 입소문이 무섭다

 

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오만원을 내야 오만원을 돌려받는 거고, 만이천원을 내면 만이천원짜리 축하를 받는 거라고.


2018년 창비신인소설상 등단한 장류진 작가의 첫 소설집이다. 소설집의 표제작인 일의 기쁨과 슬픔이 '창작과 비평' 홈페이지에 게재된 이후 SNS로 입소문이 퍼지면서 40만 명 이상이 소설을 읽고,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벌써 1년 전의 일이다). 나는 당시에는 소설에 대해 알지 못했고, 최근 책방 SNS와 독서 팟캐스트를 통해 소설집을 접했다.

  

IT업계에서 일하는 회사원인 작가가 판교 테크노밸리를 배경으로 쓴 소설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 삶과는 결이 다르다고 느꼈고, 공감하기 어려울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지나쳤다. 읽어야 하고, 더 읽고 싶은 책들이 많았으니까.


그러다 교보문고에서 2020년 다이어리를 받기 위해(5만 원 이상 구입해야 함) 읽고 싶었던 책을 주문하던 중에 작가의 소설집도 함께 데려오게 되었다. 독자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소설집이지만, 개인적으로는 큰 기대 없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소설집은 총 8편의 소설로 묶여 있는데, 첫 소설인 '잘 살겠습니다'를 읽으면서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내 주변 어딘가에서 꼭 있을 것만 같은 이야기였다. 정이현 소설가의 추천사에 '오늘의 한국 사회를 설명해줄 타임캡슐을 만든다면 넣지 않을 수 없는 책'이라는 문장이 떠오르며, 책의 진가를 눈치채기 시작했다. 정이현 작가가 1990년대를 사는 이들의 단편을 현실적으로 재연한 소설을 썼다면, 장류진 작가는 2010년대를 살아가는 20~30대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안아영 평론가는 이 책을 이야기하며 '산뜻하고, 담백하다'라는 형용사를 썼는데, 한 편 한 편 읽으며 정말 그런 기분이 들었다. 산뜻하고, 담백한 이야기에 각 단편의 화자는 깔끔하고, 센스 있다. 기대 없이 본 영화에 별점 다섯 개를 주고 싶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다. 요즘 하루 종일 일에 치여 집에 가면 골아떨어진다는 후배에게 선물하고 싶다. 나만큼 즐겁게 읽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역시, 입소문이 무섭다.




이력서에 빼곡했던 내 모든 경력이 전략기획팀으로 가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는데. 내가 일을 못해서 그랬나. 그런데 시켜보지 않고 어떻게 알까. 무엇보다 지금은 같은 부서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 왜 연봉 차이가 이렇게 많이 나야 할까. 구재가 일을 잘해서? 대체 얼마나 잘하길래? 딱 천삼십만원어치만큼?
 - 장류진, 「잘 살겠습니다」(『일의 기쁨과 슬픔』 창비, 2019) 27쪽 중에서

'자신의 연봉을 누설하면 해고할 수 있다는 사규'가 있다니. 동시에 입사해도 남녀의 연봉 차이가 나고, 여성은 핵심 부서에서 일하기가 어렵다는 현실을 언젠가 뉴스를 통해 접한 듯하지만, 이렇게 소설에서 화자에 감정이입이 되어서 이야기를 읽으니 살갗에 닿는 듯 가깝게 느껴져서 씁쓸했다.




회장의 한마디에 정말로 월급이 고스란히 포인트로 적립되어 있었다. 그 커다란 숫자를 보는 순간, 거북이알의 심장께의 무언가가 발밑의 어딘가로 곤두박질쳐지는 것만 같은 모멸감을 느꼈다고 했다.
 - 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일의 기쁨과 슬픔』 창비, 2019) 51쪽 중에서

월급을 포인트로 받는 일, 그럼에도 그들의 논리나 행동에 의문을 갖지 않는 편이 좋다는 것. 이 글을 읽으며 땅콩 회항이 떠올랐고, 세상에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짐작했다. 월급 대신 받은 포인트를 현명하게 써나가며 중고물품 사이트를 활용해 현금화를 시키는 인물을 통해 묘하게 안심이 되기도 했다.




여자를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나온다. 오늘 하루를 당신과 함께해서 즐거웠다는 말과 함께 깍듯하게 인사한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정중한 미소를 보낸다. 당신의 털끝 하나도 건드릴 마음이 없다는 듯 지체하지 않고 돌아선다.
 - 장류진,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일의 기쁨과 슬픔』 창비, 2019) 92쪽 중에서  

'내 쪽이든 상대 쪽이든 절대 양다리 상황은 만들지 않는다'라는 나름의 윤리를 가진 남성 화자가 주인공인 소설이다. 아슬아슬하고 경쾌한 연애소설인데, 어쩜 이렇게 인물의 내면을 입체적으로 그릴 수 있는지 감탄했다. 나 자신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문장을 쓰는 것도 어려운데 소설가들은 제3의 인물에 성격을 부여하고 내면까지 이렇게 설득력 있게 그릴 수 있는지 정말 놀랍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결말이 정말 통쾌하다.




자신이 서고 싶은 위치에 각자 띄엄띄엄 서 있는 관객들을 보며 공연하는 것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장우가 연주하고 부르는 음악이 더 높은 밀도로 한 사람에게 가닿는 모습, 그리고 그걸 받아들인 관객이 고개, 어깨, 손가락의 작은 움직임으로 리듬을 타는 모습이 무대에서 온전히 다 보이는 것도 좋았다. - 장류진, 「다소 낮음」(『일의 기쁨과 슬픔』 창비, 2019) 107~108쪽 중에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1집 가수가 유튜브에 장난스럽게 올린 '냉장고 송'이 수십만 조회 수를 올리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는데,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고수하는 주인공을 보며 창작하는 사람이 가진 태도와 어쩔 수 없이 끼어드는 자본의 논리를 생각했다. 모든 예술가들을 응원하고 싶게 만드는 소설이다.




우리 부부는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했다. 나에게 아이는 마치 그랜드 피아노 같은 것이었다. 평생 들어본 적 없는 아주 고귀한 소리가 날 것이다. 그 소리를 한번 들어보면 특유의 아름다움에 매혹될 것이다. 너무 매혹된 나머지 그 소리를 알기 이전의 내가 가엾다는 착각까지 하게 될지 모른다. - 장류진, 「도움의 손길」(『일의 기쁨과 슬픔』 창비, 2019) 142쪽 중에서

가사도우미를 쓰며 겪은 일화를 담은 소설인데, 화자와 가사도우미 아주머니의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누구나 소재로 쓸 수 있는 이야기지만, 상황과 인물의 감정을 이렇게 짜임새 있게 그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벌써 장류진 소설가의 두 번째 책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여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냉방이었다. 등줄기에는 이미 소름이 돋았고 블라우스도 다시 기분 좋게 펄럭였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똑바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숄더백을 한번 추켜올리고, 한 손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든 채로. 새로 산 구두 굽 소리가 경쾌했다. - 장류진, 「백한번째 이력서와 첫번째 출근길」(『일의 기쁨과 슬픔』 창비, 2019) 164쪽 중에서

20대 여성의 첫 출근길을 그린 짧은 소설이다. 내 집 마련의 희망조차 가지기 어려운 시대에 누군가의 첫 출근이 안쓰럽게 느껴지다가도 씩씩하게 걸어가는 모습에 대견하고, 미더운 마음이 들게 하는 이야기다.




새벽의 방문자들은 잊을 만하면 한번씩 찾아왔다. 여자는 초인종이 울릴 때마다 비디오폰에 달린 모니터로 남자들을 관찰했다. 그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별일 아니라고 주문을 거는 듯한 태연함, 남에게 들키기 싫은 일을 할 때의 부끄러움, 돌연 술이 확 깨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의 주저함, 그러면서도 어쨌든 곧 벌어지게 될 눈먼 섹스에 대한 설렘 등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는 얼굴들. - 장류진, 「새벽의 방문자들」(『일의 기쁨과 슬픔』 창비, 2019) 183쪽 중에서

새벽, 오피스텔 원룸에 사는 20대 여자의 집에 울리는 초인종 소리. 어떤 종류의 두려움 일지 상상이 돼서 더 몰입해서 읽었다. 초인종 소리의 정체가 오피스텔 성매매를 위해 집을 잘못 찾아온 남자들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여자는 그들을 관찰하는 것으로 두려움을 완화시킨다. 어딘가에서 누군가 듣고 있을 새벽의 초인종 소리를 생각하면, 깜깜한 골목을 혼자 걸을 때처럼 아찔해진다.




말 그대로 노파심이라는 게 이런 걸까. 사진이 지구 반대편 먼 길을 거쳐가는 동안 행여나 구겨질까, 노인은 많이 걱정했던 것 같다. 나는 시리얼 상자를 가위로 자르고, 그것을 풀로 사진의 뒷면에 단단히 붙이는 노인의 모습을 상상했다. 하얀 밤, 태양이 뭉근한 빛을 내는 창가에 앉아 가위와 풀과 사진 그리고 편지 사이를 천천히 오가며 더듬거리는 노인의 쭈글쭈글한 손을. - 장류진, 「탐페레 공항」(『일의 기쁨과 슬픔』 창비, 2019) 211쪽 중에서

아일랜드 더블린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난 화자가 핀란드의 탐페레 공항을 경유하며 만나게 된 노인과의 에피소드가 중심이 되어 벌어지는 이야기다. 취업 준비생이라는 현실과 맞물리며 어긋나던 상황이 따뜻한 여운을 남기며 끝을 맺는다. 8편의 이야기 중에 가장 마음에 오래 남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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