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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꺼움 Dec 11. 2019

[오늘, 책]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_이도우

마음에서 놓아주고 싶지 않은 이야기

읽히지 않은 책은 비치지 않는 겨울 같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거울은 그 자체로도 의미를 지니고 거기 있겠지만, 대상이 비치지 않을 때 어쩔 수 없이 고독하겠지. 창밖으로 손바닥에 올린 거울 한 조각을 내밀어, 초여름의 햇빛과 밤의 달빛을 그 안에 담고 싶다. 무언가를 비추고 싶다. - 이도우*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작가의 말 중에서


마음을 쓰는 결이 닮아 오랫동안 의지하고 있는 사람에게 선물로 받은 책이다. "달달한 로맨스가 읽고 싶었어. 그러다 제목에 이끌려 구입했어. 실제 내용은 달달한지는 몰라."라고 적힌 쪽지를 읽으며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열 페이지를 채 읽지 않고도 나는 확신했다(정말 그랬다). 이 책을 사랑하게 될 거라고. 책의 인물들과 헤어지기 아쉬워질 거라고.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서울에서 미대 입시학원 강사로 일하던 해원은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도망치듯 강원도 혜천 북현리로 온다. 그곳은 해원의 외가이자 열다섯 무렵부터 학창 시절을 보낸 곳이다. 지금은 (한때 소설가였던) 명여 이모가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민박집을 물려받아 호두나무 펜션을 운영하고 있다. 이 년 만에 찾아온 마을에는 '굿나잇 책방'이라는 독립서점이 새로 생겼는데, 해원의 동창 은섭이 운영하는 공간이었다. 맞다. 굿나잇 책방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나는 이 책이 좋아져 버렸다.


해원이 북현리를 찾은 것은 겨울이다(영하 40도의 한파가 불어닥친 아주 추운 겨울). 그러나 굿나잇 책방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백열등 불빛처럼 아늑하다. 굿나잇 책방 지기 은섭은 아주 오랫동안 해원을 좋아해 왔다. 품이 넓고 다정한 사람인 그는 한결같은 따스함으로 해원의 상처를 껴안는다. 함께 있으면 안심이 되는 사람, 초라한 모습까지도 사랑해줄 거라고 믿게 되는 사람. 은섭은 천성이 그런 사람이다.


은섭은 덤덤하게 말했지만 듣고 있는 해원은 조금 설레고 말았다. 기분이 별로여서 비딱한 질문을 던진 건데 곧이곧대로 따뜻한 대답을 들으니 스르르 기쁨이 번졌다.
- 이도우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314쪽 중에서


두 사람의 로맨스를 큰 흐름으로 해서 슬프고, 아프고, 정다운 에피소드들이 자연스럽게 전개되는데, 굿나잇 책방의 유일한 독서모임 멤버이자 단골손님들의 에피소드는 특히 좋다. 연령대가 다른 각각의 캐릭터는 모두 살아 숨 쉬는 것 같다. 왁자지껄한 이들 사이에 있으면 어쩐지 웃음을 멈추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근상이 너털웃음을 터뜨려 주변에 또다시 웃음을 일었다. 모임을 파하고 돌아가는 길, 현지와 매디슨은 처음 올 때보다는 가까이 붙어서 가로등이 켜진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갔다. 둘이 뭐라고 소곤대며 깔깔거리는 소리가 밤하늘에 즐겁게 흘러갔다.
- 이도우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172~173쪽 중에서


책을 읽는 중간중간 은섭이 자신의 책방 블로그에 쓰는 비공개 글이 나온다. 새로 들어온 독립 서적에 대한 기록과 H(해원)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쓴 글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평소 은섭이 든든하고, 한결같은 남자라면 비공개 글을 쓰는 은섭은 굉장히 귀엽고, 순진한 소년 같은 느낌을 준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내 서른한 살 인생의 첫 번째 입맞춤. (웃지 마세요. 굿나잇클럽 여러분. 웃으면 반칙.) 나는 위험에 빠진 걸까요. 내 마음이 제멋대로 나아가는 건 바라지 않습니다. 그녀는 봄이 오면 돌아갑니다. 분명 그렇게 말했죠. 도대체 그녀는····이 겨울 나를 괴롭히려고 내려온 걸까요. 나는 기꺼이, 망해가야 하는 걸까요! 굿나잇책방 블로그 비공개 글 posted by 葉
- 이도우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192쪽 중에서




책을 다 읽고도 마음에서 놓아주고 싶지 않은 이야기다. 누군가가 내가 쓴 서평을 통해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를 만나게 된다면 아마도 그때쯤이면 지금의 마음을 고이 접어둘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는 저녁이다.


* 이도우 :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라디오 작가, 카피라이터로 일했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과 『잠옷을 입으렴』을 썼다. 작가의 특유의 따뜻한 시선과, 깊고 서정적인 문체로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천천히 오래 아껴 읽고 싶은 책'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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