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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꺼움 Dec 19. 2019

[오늘, 책]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_김연수

쓰지 않은 이야기를 읽을 수 있는 독자이기를

  김연수 작가는 산문을 통해 먼저 접했다. 『소설가의 일』(문학동네, 2014)이나 『언젠가, 아마도』(컬처그라피, 2018) 등 산문을 읽었고, 여러 지면의 칼럼도 찾아 읽으며, 놓치고 싶지 않은 문장을 필사하곤 했다. 이후 소설은 단편소설인 『사월의 미, 칠월의 솔』(문학동네, 2013)을 인상 깊게 읽었음은 물론이다. 작가의 문장은 촘촘하고, 밀도 있다. 한 줄도 허투루 쓰인 문장이 없다고 느낄 만큼 탄탄하고, 깊이 있다. 그래서 그가 쓰는 글은 아주 천천히 읽으려고 노력한다. 맥락으로 이해하려는 성급한 마음을 달래며 속도를 내지 않고 책장을 넘긴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은 처음으로 읽은 그의 장편소설이다. 일단 이 소설은 제목과 목차의 문장이 아름답다. 조용히 읊조리면 아득해지면서 시를 읽는 듯하다. (김연수 작가가 소설에 앞서 시로 등단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파란 달이 뜨는 바다 아래 오로라 물고기' , '얼마나 오래 안고 있어야 밤과 낮은' . '그대가 들려주는 말은 내 귀로도 들리고' 이처럼 이미지가 떠오르는 시적인 문장이 박힌 목차에서 오래 머물게 된다.


  소설은 미국 시애틀에서 자란 1987년생 입양아 카밀라가 한국의 친모 '지은'과 밝혀지지 않은 아버지의 정체를 찾기 위한 여정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야기는 화자가 바뀌면서 전개되는데, 카밀라에서 지은으로 바뀐 시선은 우리(지은의 친구들)로까지 이어진다. 세상의 많은 일들이 그러하듯 입양이라는 단일한 사건 안에는 여러 입장과 사연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건 마치 엉망으로 꼬여버린 실타래와 비슷하다. 거의 풀렸다 싶지만 쉽게 풀리지 않는 그것처럼 소설 속의 진실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진실보다 중요한 게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심연이 존재한다(286쪽)'는 것. 누구도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섣불리 예단하고, 판단하기를 멈춰야 하지 않을까?


  소설에는 여러 편의 시가 등장한다. 시는 언제나 설명하기 어려운 무엇이지만, 이 소설 속에서는 시가 어떤 실마리가 된다. 희미한 진실은 시를 통해 드러난다. 분명 소설을 읽었는데 시라는 장르가 품은 비밀에 한 걸음 다가간 듯하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좀 더 찾아 읽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뿐 아니라 카밀라가 글을 쓰게 되는 과정을 따라가면서 쓰는 사람의 처음과 지속할 수 있는 힘에 대해 곱씹어 볼 수 있어 좋았다. 이야기는 끝에 작가의 말을 통해 비로소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 들었는데, 작가는 마지막 한 줄을 이렇게 썼다. "부디 이 소설에서 쓰지 않은 이야기를 당신이 읽을 수 있기를." 이 문장을 읽으며 화답하고 싶은 마음을 서평에 잘 담고 싶었다. 작가가 쓰지 않은 이야기를 잘 읽을 수 있는 독자가 되고 싶다.

      



나는 유이치의 말대로 한번 해보기로 했다. 그가 제안한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일단 매일 시간을 정한다. 한 시간 정도라면 가장 좋겠고, 삼십 분이라도 상관없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글을 쓰기 시작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기억해. 뭔가 쓰는 순간, 넌 작가가 되는 거야.").  <중략> 문법 같은 건 맞지 않아도 상관없으며 진부한 표현도 가리지 않는다("질보다는 양이야. 모든 재능이 그렇듯이.") 하루에 최소한 세 페이지는 반드시 채워야만 하며, 더 쓰고 싶다면 얼마든지 더 쓸 수 있다. 다음날 그 시간이 될 때까지 계속 써도 된다. 만약 정해진 시간에 세 페이지를 채우지 못했다면 그날 중에 시간을 내어 다시 책상 앞에 앉는다.
- 김연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문학동네, 2015) 28쪽 중에서  
그중에도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건 그믐 가까울 무렵 물 밖으로 나올 때입니다. 하늘에도 빛이 없으니까 그저 위를 향해서 올라가기만 하는데, 그러다 갑자기 별들이 확 쏟아질 듯 제 시선으로 들어올 때가 있는데, 그러면 물 밖으로 다 나온 것입니다. 별빛이 제 쪽으로 떨어지는 그 순간은 정말 아름다워요. 이런 세상에 살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 김연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문학동네, 2015) 141쪽 중에서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건 나의 일이었다. 너와 헤어진 뒤로 나는 단 하루도 너를 잊은 적이 없었다. 2005년을 기점으로 너는 나보다 더 나이가 많아졌지. 그럼에도 네가 영원히 내 딸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내 안에서 나보다 나이가 많은 네가 나왔다니. 그게 얼마나 대단한 경험인지 네게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있는 입술이 내게는 없네. 네 눈을 빤히 쳐다보고 싶지만, 너를 바라볼 눈동자가 내게는 없네. 너를 안고 싶으나, 두 팔이 없네. 두 팔이 없으니 포옹도 없고, 입술이 없으니 키스도 없고, 눈동자가 없으니 빛도 없네. 포옹도, 키스도, 빛도 없으니. 슬퍼라, 여긴 사랑이 없는 곳이네.
- 김연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문학동네, 2015) 201쪽 중에서




오늘 김연수 작가의 장편소설을 몇 권 더 주문하며, 책장에 그를 위한 칸을 만들어야지, 생각했다. 아직 읽어야 할 작품들이 더 많다는 사실이 그저 든든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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