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눈밭에서 길을 잃는다면

playlist, Conto de Fadas_Dom La Nena

by 기꺼움




필사를 좋아한다. 나의 필사 생활에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첫 번째는 책을 필사하는 일이다. 필사할 책을 신중하게 고르고, 마음이 어지러울 때 필사를 한다. 잘 깎은 연필과 공책만 있으면 충분하다. 늦은 밤에서 조용한 새벽, 사각사각 연필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단정해진다.


두 번째는 칼럼을 필사하는 일이다. 내가 쓰는 글이 도무지 풀리지 않아서 답답할 때 필사를 한다. 노트북에 한글 파일을 열고 키보드에 손가락을 얹는다. 채널예스 웹진에는 다양한 명사(주로 소설가, 시인 등)의 칼럼이 있다. 연재 중인 칼럼부터 연재가 종료된 불후의 칼럼까지. 글쓰기 고수들이 써낸 빼어난 칼럼들이 가득하다. 빛나는 보석이 부럽지 않은 나만의 보물창고다.




오늘은 두 번째 필사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칼럼을 필사하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즐겁다. 내가 쓰는 종이 위에서 길을 잃어버린 나는 고수들의 글을 따라 쓰며 묘한 쾌감을 느낀다. 경쾌한 키보드 소리와 함께 배우고 싶고, 갖고 싶은 멋진 문장으로 막힘없이 백지를 채운다. 이런 행위를 좀 더 시적으로 비유하자면 이렇다.

나는 영화 러브 레터에 나올 법한 하얀 눈밭에서 길을 잃어 망연자실한다. 자세히 보니 하나의 발자국이 길게 찍혀 있다. 천천히 앞서 낸 발자국을 쫓아간다. 멈춰 선 자리 아래로 작은 마을의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진다. 그제야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내가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 어렴풋이 떠오른다.


요즘에는 김연수 소설가가 2016~2017년 사이에 썼던 <김연수의 문음친교>라는 주제로 묶인 칼럼을 필사한다. ‘문학과 음악 사이, 김연수가 말한다’라는 부재를 가진 글이다. 소설과 음악을 어쩜 그렇게 절묘하게 버무려서 통찰력 있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지. 그의 밀도 높은 글을 읽다 보면, 아니 필사하다 보면 매번 숙연해진다.


얼마 전 독서 팟캐스트 ‘책읽아웃’에서 김연수 소설가가 말했다. “발표한 글의 10배 이상의 글을 저는 지우고 있어요. 지우개와 Delete 키가 저한테 가장 중요한 도구입니다. 누군가 매일 쓰십니까? 묻는다면 매일 지우고 있다고 답합니다.” 그리고 덧붙이며 건네는 질문은 이랬다. “제가 글을 잘 쓸 것 같죠?” 수십 년 글을 써온 뛰어난 소설가의 말이다.


도깨비방망이를 두드리는 것처럼 ‘뚝딱’ 나오는 글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내가 필사하는 칼럼은 Delete 키를 몇 번이나 누르셨을지 생각하며 천천히 문장을 옮긴다. 한 편의 칼럼을 필사한 뒤, 겨우 길을 찾아가는 내 글에 김연수 소설가의 칼럼에 담긴 문장과 음악을 입히며 매듭짓는다.


종일 비가 내리더니 기온이 떨어졌다. 필사적으로 가지에 매달렸던 많은 잎들이 바람에 휩쓸렸다. 비가 그치자 때아닌 황사가 찾아와 곧 떠날 늦가을의 눈앞을 흐리게 했다. 지난 토요일 광화문에서 반짝이던 수많은 불빛들은 이제 모두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오늘은 저녁 하늘로 둥근 달이 떠올랐다. 손수 만든 망원경으로 달을 보던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이름 붙인 고요한 바다들이 또렷하게 보다. 그 달을 바라보며 나는 광장을 가로질렀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브라질 출신의 첼리스트이자 싱어송라이터인 돔 라 네나(Dom La Nena)의 ‘Conto de Fadas’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모든 것이 꿈속의 풍경 같았다. 저 달 아래에 절망한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저녁이었다.
- 채널예스 칼럼, 김연수의 문음친교 시즌2 중에서


https://www.youtube.com/watch?v=FQz-FdVpCIU&list=PLa8akc3Kuq32lp-GyYlT2pDUZ-JFf5eIf&index=2&t=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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