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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꺼움 Feb 25. 2020

[오늘, 책]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_김소연

봄비가 오는 어느 주말

사랑의 기쁨을 만끽하기에 인간의 삶은 너무 길고, 사랑을 온전히 이해하기에 인간의 삶은 너무 짧은 것 같다.
- 김소연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문학과지성사, 2019) 23쪽 중에서




  봄비가 오는 어느 주말, 전라북도 완주 한옥마을을 찾았다. 산새가 좋아서 절을 찾아온 것처럼 마음이 고요해지는 그곳에는 「플리커 책방」이라는 한옥 책방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책방으로 들어갔다. 적당한 크기의 공간에 책들 대부분이 전면으로 큐레이션 되어 있었다. 책방 지기가 선별해놓은 책들이 내 취향과 다르지 않아서 아주 천천히 신중하게 둘러보았다. 마음이 가는 많은 책들 중에서 김소연 시인의 산문집을 발견해 구입했고, 비밀 포장된 책 한 권을 동행한 다정한 이에게 선물 받았다.


  



  근처에서 다슬기 돌솥밥을 먹고(담백하고, 슴슴한 맛이 일품이다), 조금 더 한적한 곳에 세워진 「카페 라온」으로 갔다. 진한 아메리카노와 초코 크루아상을 받아서 3층으로 올라갔다. 커다란 창에 탁 트인 풍경이 그대로 보이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옆으로 나란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곳이었다. 안락한 소파가 편안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책방에서 데려온 책을 읽었다.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관계는 시간과 정성이 쌓아온 특별한 무엇이다. 함께였지만, 혼자인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이 시간은 나를 건강하게 한다.





  내가 쓰는 글이 평범한 모닝빵이라면, 김소연 시인의 산문집은 언어로 쌓아 올린 겹겹의 크루아상과 닮았다. 이런 시인이 '사랑'을 말한다면, 그 책은 읽지 않을 이유가 없다. 사랑에 대한 다양한 단상은 우리가 소비하는 '사랑'이라는 표현을 넘어서 더 깊은 곳까지 들어가게 한다. 그 안에서 다양하게 변주되는 '사랑'이 쓸쓸하고, 아름다웠다. 목차가 시처럼 읽히는 게 좋아서 몇 번을 곱씹었다. 「정말 알고 싶어서 묻는, 사랑에 대한 질문 하나」「너에게 들려줄 말을 나에게 들려주기 위하여」 그리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능력」이란 제목이 유독 좋았다.


 책의 내용을 줄거리로 요약하기보다는 문장 자체에서 오는 사유의 힘이 의미 있는 글이기에 몇 개의 문장을 빌려서 내 생각을 조금씩 풀어봐야겠다. "설렘이 성장하여 든든함이 되고, 두근거림이 성장하여 애틋함이 되고, 반함이 성장하여 믿음이 되는 시간의 순례를 함께 겪어야만 그녀는 비로소 사랑이라고 받아들였다.(18쪽)" 시간의 순례라는 표현에 매료되었고, 설렘과 두근거림, 반함이 사라진 자리에 남아 있는 든든함과 애틋함, 믿음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시간의 순례를 겪고, 성장한 사랑의 형태를 무심하게 대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공통점이 없는 두 사람이 하는 사랑을 언어로 그려낸 문장의 리듬감이 좋았다. "여행을 함께하면, 그는 많은 도시를 섭렵하기를 좋아했고 그녀는 한 도시에 오래 머무는 것을 좋아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항상 의아해할 수 있어서 나쁘지 않았지만,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참고 견디고 있다는 괴로움이 항상 잠복해 있었다.(29쪽)" 너무나 개별적인 존재인 우리가 사랑을 한다는 게 너무나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수많은 다름을 극복하고 사랑의 항상성을 유지하길 기대하는 것은 모순일까?


  마지막 세 편의 산문은 시인과 시집에 기대에 쓴 글이다. 이 산문을 읽고 나면, 이병률 시인, 최승자 시인, 페르난도 페소아를 더 깊은 시선으로 보게 된다. 어떤 글을 통해 누군가를 새롭게 볼 수 있게 만드는 건 멋진 일이다. 나는 언제쯤 그렇게 멋진 일을 해낼 수 있을지 모른 채로 하루씩 쌓아가는 중이다. 이병률 시인의 『혼자가 혼자에게』(달, 2019)를 주문하고, 그를 표현한 문장을 다시 읽는다. "헤어질 때에는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제 갈 길로 가는 모습을 다 지켜보고 마지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물건이 별로 없었던 그의 집처럼 그는 헐렁하게 웃고 헐렁하게 등을 돌려 걸어갔다.(176쪽)" 




  좋은 사람을 따듯하고, 섬세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싶다. 겹겹으로 쌓여서 깊은 풍미를 내는 멋진 문장을 쓰고 싶다. 김소연의 시인의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문학과 지성사, 2019)를 읽고 나니 더욱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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