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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꺼움 Feb 23. 2020

[오늘, 책] 오늘 뭐 먹지?_권여선

권여선 음식 산문집


  소설가나 시인이 쓰는 산문은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권여선 작가의 소설은 놓치지 않고 찾아 읽는 편인데, 인물의 내면까지 깊게 파고들어 뭔가 건드리는 지점이 많은 이야기를 쓴다. 그중 『안녕, 주정뱅이』(창비, 2016)라는 소설집에는 유독 술을 마시는 화자가 자주 등장하는데, 평소 술과 안주에 대한 작가의 깊은 애정이 묻어 난.


  누구나 좋아하는 것에 대해 말할 때는 눈이 빛난다. 평소에는 무뚝뚝하고, 표정 변화가 없던 동료가 낚시 이야기만 나오면 생기가 돌기도 하고, 운동 홀릭인 선배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운동을 독려한다. 나는 함께 책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앞에서는 언제나 무장해제된다. 권여선 작가에겐 술, 특히 안주가 그런 것 같다. 마치 말하듯 쓰인 이 산문집은 작가의 마음과 정성이 듬뿍 들어가 있다.


  음식 같은 경우는 주로 눈으로 보았을 때, 군침이 돈다거나 식욕이 자극되는데, 이 산문집은 단지 문장을 읽었을 뿐인데 음식의 모습이 그려지고, 맛도 느껴지는 듯했다. 어쩜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지 감탄했다. 말보다 글이 능숙한 작가가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 글을 쓸 때 나오는 시너지는 엄청나구나, 하고 생각했다. 산문은 허가 아니라 작가를 온전하게 감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굉장히 새롭고, 신선했다. 「술꾼들의 모국어」라는 제목의 서문부터 독자의 마음을 훔친다.  


"오늘 안주 뭐 먹지?"  고작 두 글자 첨가했을 뿐인데 문장에 생기가 돌고 윤기가 흐르고 훅 치고 들어오는 힘이 느껴지지 않는가. 지인들은 벌써 내가 소설에 못 푼 한을 산문에서 주야장천 풀어내겠구나 걱정들이 태산이지만 마음껏 걱정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무엇을 걱정하든 그 이상을 쓰는 게 내 목표다. 아, 다음 안주는 뭐 쓰지? 생각만으로도 설렌다.
 - 권여선 오늘, 뭐 먹지?(한겨례출판,  2018) 10~11쪽 중에서


  총 5부로 구성되어 있는 책은 봄부터 겨울까지 계절별 맛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마지막 5부는 환절기라는 제목으로 음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읽는 맛이 좋은 책이니까, 몇 가지 음식을 표현한 문장만 예고편으로 다루는 수준에서 찬찬히 정성껏 소개해봐야겠다.


[1부] 봄, 청춘의 맛


  순대와 만두, 김밥, 부침개, 젓갈에 대한 산문이 담겨 있다. 만두에 대한 맛 표현에 당장 만두를 한 입 베어 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왕짱구 분식의 만두는 걀쭉하니 한 입에 먹기 딱 좋은 크기로, 얇고 쫄깃한 피 속에 고기와 야채가 들어 있고 씹으면 뜨거운 육즙이 살짝 배어 나오는, 맛이 아주 기가 막힌 만두였다."(34쪽) 작가는 만두와 술의 조합은 더할 나위 없다는데, 그 조화로움이 궁금해졌다. (『아무튼, 비건』(위고, 2018)을 읽었을 때의 마음가짐은 잠시 접어둘 수밖에 없었음을 밝힌다.)


[2부] 여름, 이열치열의 맛


  면, 물회, 땡초, 밑반찬을 다룬 글인데, 나는 청양고추가 들어간 매운 음식을 좋아하기 때문에 아무래 「땡초의 계절」이라는 제목의 산문에서 식욕을 참기 어려웠다. "이제 밥만 있으면 된다. 따끈한 호박잎 위에 뜨끈한 깡장과 밥을 얹어 쌈을 싸 먹으면 입에 불이 난다. 불이 나긴 나는데, 요즘 매운 음식처럼 불만 나고 마는 게 아니라 가슴속 깊숙이 구수하고 복잡하고 그리운 불이 난다."(107쪽) 간장에 싸 먹는 호박잎 쌈은 먹어봤는데, 매운 깡장에 먹어본 적은 없어서, 도전해보고 싶은 메뉴다.


[3부] 가을, 다디단 맛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먹었던 냄비국수 이야기를 시작으로 따끈한 고로케와 단맛이 배어 있는 가을무까지 수확의 계절인 가을에 걸맞은 풍성한 글이다. 무를 넣고 조린 갈치조림을 말하는 문장에서는 KO 패. 입맛이 돌게 함은 물론 이렇게 멋진 문장으로 표현된 '갈치조림'에게 살짝 질투가 났다. "나는 밥 한 숟가락에 조린 무 한 점을 얹고 그 위에 갈치를 얹는다. 햅쌀밥과 가을무와 갈치 속살로 이루어진 자그마한 삼단 조각케이크를 나는 한입에 넣는다. 따로 먹는 것과 같이 먹는 건 전혀 다른 맛있다. 정말 이렇게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밥과 무와 갈치가 어울려내는 이 끝없이 달고 달고 다디단 가을의 무지개를."(168쪽)


[4부] 겨울, 처음의 맛


  감자탕, 꼬막 조림, 어묵꼬치까지 좋아하는 음식이 가득한 챕터였다. 그뿐만 아니라 집밥에 대한 작가의 기막힌 해석에 왠지 모를 고마움이 밀려왔다. "집밥이란 말을 들으면 누구나 향수에 젖은 표정을 짓고 입속에 고인 침을 조용히 삼키는데, 이건 순전히 집밥을 하지는 않고 먹고만 싶어 하는 사람들의 환상이 아닐까 싶다. '오늘 뭐 먹지?'라는 잔잔한 기대가 '오늘 뭐 해먹지?'로 바뀌는 순간 무거운 의무가 된다"(207쪽)


[5부] 환절기


  떡볶이랑 같이 먹는 오징어튀김을 좋아하는데, 작가가 소개하는 마른오징어로 튀긴 '까칠한 오징어튀김'을 맛보고 싶었고, 매년 자유로운 명절에 먹고 싶은 음식을 적당히 해 먹는 일상이 부럽기도 했다. 한밤중에 깨서 먹고 싶어 진다는 간짜장 맛집은 어디일까? "간짜장의 완승이다. 그나마 팬을 의식하고 좀 덜 추하게 먹으려 해도 간짜장은 입가에 소스를 묻혀가며 면을 쭉쭉 빨아들여 먹는 게 제일 맛있으니 어쩔 수 없다."(245쪽) 짜장은 역시 간짜장이지. 서평을 쓰면서 책을 다시 읽었더니, 자꾸 입맛이 돈다. 저녁에 뭐 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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