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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우 Jun 10. 2016

<아가씨>: 남성에게 소비되는 여성성으로부터의 해방

#포르노 #섹스토이 #박찬욱 #페미니즘

스포일러 있습니다.



남성으로부터 소비되는 여성성
성적으로만 소비되는 여성들

"남성으로부터 소비되는 여성성"이라 하면 말 그대로 남성의 관점으로만 해석되는 여성의 성격이나 성향을 말합니다. <아가씨> 바깥으로 오면 주로 포르노가 이런 것을 잘 보여줍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일본 포르노 중에서도 강간물-강간을 컨셉으로 잡고 성관계를 하는 포르노에선 남성이 여성을 강간하고, 강간당하던 여성은 어느새 섹스에 취해 강간하던 남성과 사랑에 빠집니다. 이는 전형적으로 남성의 관점으로 강간을 해석하는 겁니다. 


세상에 강간범과 사랑에 빠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남녀를 떠나서 그냥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하지만 '강간을 통해 사랑에 빠지는 여성'은 꽤나 자주 남성들을 대상으로 한 콘텐츠에서 사용됩니다. 비단 일본 포르노에서만 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의 옛날 어떤 소설-제목이 기억이 안나네요-에서도 이런 식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여성은 강간당하고, 강간임신을 하지만 강간을 했던 그 사람에게 애뜻한 감정을 품지요. 그 소설의 작가가 남성이었다는 건 우연이 아닐 겁니다. 오로지 남성의 관점으로 강간을 해석하는 겁니다. "너도 사실 좋잖아"라면서. 백작(하정우 연기)이 히데코를 강간하려고 하면서 하는 말도 비슷하죠. 그는 히데코에게 여성들이 강간당할 때 더욱 큰 쾌락을 느낀다는 근거없는, 하지만 포르노에선 '진리'인 이야기를 합니다. (정확한 대사가 기억이 안나네?)


박찬욱 감독이 포르노라는 소재를 선택한 이유

박찬욱이 포르노라는 소재를 선택한 이유는 남성이 여성을 가장 극단적으로 소비하는 방법 중 하나가 포르노이기 때문입니다. 포르노 중에서도 <아가씨>에 등장하는 포르노는 야설과 삽화이지요. 남성 코우즈키(조진웅 연기)는 여성 히데코(김민희 연기)에게 야설을 읽히고 퍼포먼스(?)를 하게 하면서 해당 야설을 남성들에게 판매하는 사업을 합니다. 히데코라는 여성의 입으로 야설을 읽는다고해도 그것은 철저히 코우즈키의 연출과 기획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남성이라는 필터를 통해 투과된 여성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남자가 보고 싶어하는 여자"랄까요. 


억압되는 여성성
남자 둘이 히데코를 억압하는 모습입니다. 머리를 짓누르고 어깨 위에 손을 올리고 있죠. 어깨 위에 손을 올린다는 건 '내가 너보다 위에 있다'라는 표현입니다.


영화의 남성들은 여성들을 "남성이 보고 싶어하는 여성"이 되게끔 훈육합니다. 히데코의 어렸을 적을 보여주는 영화의 2장 때 히데코와 그의 이모(문소리 연기)는 일본어를 공부합니다. 책에는 그림과 글이 적혀있어서 그림을 보고 글을 읽으며 무엇이 무엇인지를 공부하게 됩니다. 그때 남성의 성기와 여성의 성기 그림이 책에 등장하고, 이모는 이걸 "자지", "보지"로 읽습니다. 그리고 이모와 히데코는 서로를 보면서 킥킥대고 웃지요. 그걸 보던 코우즈키는 그들의 등 뒤에 선 뒤 양 손으로 두 사람의 얼굴을 가리고, 마구 흔듭니다. (사족, 조진웅이 이 장면을 두고 너무 폭력적이라 주저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문소리가 '손만 갔다대게끔 하고 여자들이 얼굴을 흔드는 방식이면 어떻겠느냐' 라는 제안을 해서 그렇게 촬영되었다고 합니다)


이 장면이 뭘 상징하느냐? "여성들이 이야기하는 섹스", "여성을 통해 소비되는 섹스"를 원천차단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코우즈키가 이모와 어린 히데코의 얼굴을 가리면서 눈과 코와 입을 막는 건 그런 의미입니다. 보지도 말고, 느끼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는 의미죠. '니들이 감히 신성한 자지를 자지라 말해?' 


포르노로 여자를 배운 남자들의 한심한 모습


남성들이 원하는 여성이 무엇이건 간에, 남성들은 여성들을 변하게 하지 못합니다. 코우즈키는 장기간의 '훈육'을 통해 히데코를 "남성이 원하는 여성"이 되게끔 만들려하지만, 이모는 견디다 못해 자살하고, 히데코는 어떠한 남성에게도 정욕을 느끼지 못합니다. 훈육이 실패한거죠. 아니, 실패한 게 아니라 애초에 될 일이 아닌거였던 겁니다. 온갖 야설을 읽혀서 남성과 여성이 섹스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남성에 헌신하는 여성을 보여줬음에도 동성애자였던 히데코는 변치 않은 겁니다. 동성애를 질병으로 보고 '치료'를 통해 동성애자를 이성애자로 만들겠다는 한국의 주류 기독교 멍청이들(ex. 민주당의 박영선, 새누리당의 이혜훈)에게 싸대기를 때리는 장면이기도 하지요. 박찬욱은 말합니다. "그거 안돼 이새끼들아". 한편으론 훈육이 효과가 있기는 했습니다. 히데코의 퍼포먼스를 더욱 매혹적으로 만드는 정도의 효과.


3장에서 백작은 히데코와 성관계를 가지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걸 느껴보게해주겠다면서 아주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여주죠. 백작은 전희를 하며 히데코의 가슴을 애무하지만 정작 히데코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합니다. 아마 히데코가 신음을 연기할 때 백작은 기세등등해졌겠죠. '역시 너도 별 수 없는 온나(おんな, 여성)로군'하면서. 이 장면이 웃긴 이유는 포르노를 통해 섹스를 배우고 여성을 배운 남성의 가장 유치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모습이죠.


남성이 거세된 여성 간의 사랑

히데코는 남성이 아닌 숙희에게 사랑에 빠집니다. 그리고 숙희도 남성이 아닌 히데코에게 사랑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 둘은 사랑을 나누죠. 이 둘의 섹스가 이 영화에서 중요한 이유는 어떠한 남성이나 남성성이 여기에 개입되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성은 완전히 배제된 채로 여성들간의 섹스를 나누죠. 표면적으로 보면 단순히 두 여성이 섹스를 하는 것이지만, 여기서 봐야될 건 그 둘 사이에 남성이 없다는 겁니다. 남성으로부터 소비되어온 여성성을 극복한, 해방된 여성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의 정사신은 중요합니다. 전장에서 깃발 꽂는 느낌이랄까요.


구슬 장난감의 의미 변화

구슬 장난감은 영화에서 세번 등장합니다. 1장에서 숙희가 히데코의 물건들을 열어볼 때 한번, 2장에서 히데코가 코우즈키에서 훈육받을 때 체벌의 도구로서 한번, 그리고 3장에서 히데코과 숙희가 성관계를 가질 때 한번. 코우즈키가 어린 히데코에게 구슬을 쓸 때 그것은 히데코를 억압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제대로 야설을 읽으라는-'올바른' 여성이 되라는 남성적인 억압의 도구였죠. 그런데 3장에 와서 이 도구의 성격이 변합니다. 여성을 억압하는 장난감이었던 구슬 장난감은 3장에 와서 여성간의 섹스를 더욱 즐겁게해주는 도구로 활용되죠. 이조차도 일종의 남성성을 극복하는 하나의 장치로 볼 수 있습니다. 


혹자는 "3장에서 구슬의 의미가 바뀌는 게 '남성들의 훈육'을 유희거리로 삼아서 진지하게 문제 삼아야할 대상을 평가절하한 거 아니냐"는 식의 비판을 합니다. 저는 이게 딱히 문제적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박찬욱은 문제를 문제로 여기고 직접 상대하는 방법보다는 그 문제를 우회하며 문제를 해소하는 방식을 택한 듯 합니다. 이는 '동성간의 섹스'라는 한국에선 다소 금기시되는 장면을 연출함에 있어서 박찬욱의 태도와도 일관됩니다. 박찬욱은 동성간의 섹스를 보여줄 때, 이런저런 준비과정을 거치지 않습니다. 그냥, 보여줍니다. 그런 준비과정이 뭐가 필요하냐면서 말이죠. "어떻게 그런 장면을 그렇게 막 보여줄 수 있어요?"란 말에 박찬욱은 이렇게 답할 겁니다. "왜 안되는디?"


왜 달인가?
음양오행설?

영화는 달이 나오면서 끝납니다. 왜 태양이 아니라 달일까요? 저는 처음엔 이게 음양오행설에서 여성이 상징하는 게 '음'이이고 달 또한 '음'이기에 태양(양)이 아닌 달로 영화를 마무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달 만세!(Praise the moon!)하는 느낌으로 말이죠. 그런데 이건 아닌 거 같습니다. 


음양오행설은 기본적으로 음과 양의 조화가 이루어져야한다고 말합니다. 물(음)과 불(양)이 조화를 이루고, 여성(음)과 남성(양)이 조화를 이루는 게 가장 이상적이라고 말하죠. 그런 의미에서 박찬욱이 여성 간의 사랑을 다루는데 남성과 여성간의 조화를 이루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음양오행설을 받아들이면서 달을 영화 엔딩에 넣었을 것 같진 않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박찬욱의 미스죠. 그런데 박찬욱이 이런 걸 실수할 양반은 아니고.


앞으로의 미래가 만만하지만은 평탄대로는 아닐 거라는 것

히데코와 숙희는 배 안에서 사랑을 나눕니다. 바다 위에 있다는 건 이들의 앞으로의 삶이 평탄치만은 않을 거라는 걸 보여줍니다. 바다 위에 있는 배는 위태롭게 흔들리고, 큰 파도를 만나면 언제건 박살날 수 있을 정도로 약합니다. 히데코와 숙희의 사랑은 다른 어떤 사랑만큼이나 아름다울 수 있지만, 세상은 여전히 폭력적이고, 그들의 사랑을 허용치 않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달'이 마지막에 나온 건 그들의 삶이 앞으로 행복하지만은 않을 거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등장한 게 아닌 가 합니다. 태양은 너무 희망적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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