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모임 발제문을 수정 및 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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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를 사랑해야 타인도 사랑할 수 있다. (자립)
지금은 너무도 흔한 그리고 당연한(?) 말이 되었지만 56년도에 발간된 책에서도 이런 아이디어가 존재한다는 건 특이할만하고, 그 교훈은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타인을 사랑할 수 있을 때 '나'를 사랑할 수 있고, '나'를 사랑할 수 있을 때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명제가 이 책의 대부분 내용을 함축한다고 생각한다. 이 명제에 동의하지 않을 독자도 분명 존재할 수 있지만, 발제자 본인은 (기독교 신자가 아님에도) 동의하기에 해당 명제에 대한 의문은 제기하지 않겠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려면 전제되어야할 것이 있다. "네 몸"을 사랑해야한다는 것이다. "네 몸"을 가벼이 여기고 자기 파괴적인 생활을 하는 자는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도 실패할 것이다. "네 몸"을 대하듯 행동하면 "네 이웃"에게도 파괴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을 실천하기 위해선 스스로를 관리해야한다고 말한다.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익혀야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에리히 프롬에게 사랑이라는 행위는 어떠한 행위보다도 어려운 행위이고 훈련이 필요한 기술이다.
'나'를 사랑할 수 없다면 타인을 사랑할 수 없고, '나'를 사랑할 수 없는 자들이 사랑을 시작하면 그 관계는 의존적 관계 혹은 타인 파괴적·자기 파괴적 관계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폐해는 비단 연애 관계에서만 일어나지 않고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우정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2. 인류애
이 책은 비단 두 개인간의 사랑을 소재로만 삼고 있는 것은 아닌 듯 하다. 메인 토픽이 연애와 연관되는 '어떤 것'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 책은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어떠해야하는 가에 대해 다루고, 또 굳이 애인 관계 아니더라도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떠해야하는 가에 대한 안을 제시해주는 듯 하다.
흥미로운 부분은 '나'를 사랑할 수 있으면 타인을 사랑할 수 있고, 타인을 사랑한다는 건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미움받을 용기 2권>에서도 언급된다. 아들러 심리학에 대해 설파하는 책 속 철학자 역시 인류애를 주장한다. 자립을 해야만 사랑할 수 있다고하고, 자립과 함께 타인을 사랑하게될 때 그 사랑은 사람으로 이루어져있는 공동체에 대한 사랑과 다르지 않다는 것, 공동체가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가게끔 사랑해야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여러모로 <사랑의 기술>과 <미움받을 용기>는 통하는 부분이 많다. 자립에 대한 거나, 인류애에 대한거나.
3. 사랑의 대상
애초에 인류애를 부르짖는 판에, 사랑의 대상은 별로 중요치 않다는 게 이 책의 내용이다. '나'를 진정 사랑할 수 있게되면 누구나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누구나를 사랑할 수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식의 뉘앙스도 느껴진다. 이는 이론적으론 그럴듯하게 보이고, 실제 이런 식으로 사랑을 하는 자들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사람들이 모두 부처나 성자가 아닌 탓에 실천하기엔 꽤나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주장에 동의하는데, 타인의 어떠한 모습이든 수용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자에게 있어서 사랑의 대상은 중요치 않다. 이는 관대한 리더가 어떤 모습의 팀원도 수용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부족한 '나'를 사랑하듯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누구나에게 거슬릴만한 어떤 특이점을 갖고 있는 대상이라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고, 또 사랑할 수 없다면 이는 전적으로 '타인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다.
'나'에게 어떤 이상형이 굳건하게 잡혀있고, 이상형에 부합하지 않는 어떤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면 그건 그 사람이 이상형에 부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나'가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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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턴 브런치에 추가하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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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성애
에리히 프롬은 성애에 대해선 그리 좋은 평가를 하지 않았다. 사랑에 성애가 포함될 때 그것을 기만적일 수 있다고 한 거다. 표현이 참 재미있는데 '기만적이다'라고 하지 않고 '기만적일 수 있다'라면서 성애가 포함된 사랑이 기만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열어두었다. 하지만 정작 성애가 포함된 기만적이지 않은 사랑에 대해선 조금도 서술하지 않았다.
독서모임에 참여한 여성 두 분에게 "성애가 없는 데 누군가에게 반해본 적이 있느냐" 물었고, "그런 적은 없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는 (남자인) 나 역시 마찬가지다. 적어도 모임에 참여한 3인은 누군가를 성욕의 대상으로 볼 때 '일'이 시작됐다. 3인은 모두 기만적인 사랑을 했던 것이고, 성욕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포장했던 걸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나 이는 진단내릴 수도 없는 부분이다.
에리히 프롬이 성애에 대해 이런 판단을 내린 이유는 알 거 같다. 그는 책 속에서 '나'를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더 확장해 인류에 대한 사랑에까지 나아가게해야한다고 말한다. '나'를 사랑할 때 '나'가 성욕을 가지지는 않기 때문에 성애를 통해 누군가에게 사랑을 빠진다면 그 사랑의 방식은 '나'를 사랑하는 방식과는 사뭇 다른 무언가이고, 이 사랑은 <사랑의 기술>에서 길게 서술되는 사랑의 방법론과는 다른 무엇이다. 그런 점에서 이는 기만적일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누군가에게 연애감정을 느낄 때의 감정-사랑과 나와 이웃에게 느끼는 감정-사랑은 그 색깔이 다르다. 그런데 에리히 프롬은 연애감정의 대상에게나 이웃에게나 동일한 색깔의 사랑을 해야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는 이론적으로나 그럴 듯하게 보이고, 이상적인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에리히 프롬도 인정하듯) 실천하기는 어렵고,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연애감정의 대상에게 우리는 One and only의 감정을 투사한다. 그리고 그런 감정은 그 대상을 제외한 누군가들에게 보내는 감정과 사뭇 다를 수 밖에 없다. 에리히 프롬은 이 부분을 인간이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걸까? 아니면 그저 이상론을 제시한걸까? 전자인 것 같긴한데, 아, 그 길은 멀고도 험난하고, 또 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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