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친구는 2016년 초에 대기업에 붙어서 현재 회사에 출퇴근하고 있다. 그 대기업은 대기업 중에서도 탑급에 속하는 연봉과 복지를 제공해주는 기업이다. 취업을 준비하는 아해들은 모두 그 그룹에 가고싶어 한다. 돈도 많이 주는데 복지까지 짱짱하니까. 사무직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무직들과 달리) 야근이랄 것도 없고 주말에 출근을 하지도 않는데 월급은 야근을 하는 회사들보다 짱짱하다. 그런데 친구는 입사한지 한달도 안되서 2017년 1월에 퇴사를 하겠다고 내게 알려오고, 최근에는 연락오더니 2016년 8~9월에 퇴사를 하겠다고 알려왔다.
미래-자아실현
그는 회사에서는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친구가 말하는 미래 보장은 통장에 돈이 안정적으로 쌓여가느냐가 아니라, 이 회사에 오랫동안 남아있으면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는가다. 그리고 그는 지금의 회사에서 그럴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기에 이르렀다.
이런 확신을 하게된 계기를 제공한 상사가 있다. 10년차 상사가 술자리에서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는 지금 10년 뒤 너의 모습을 보고 있다." 그런데 그 10년차 상사라는 자의 존재는 친구에게 존경을 자아내기는 커녕 한심함만을 자아냈는데, 그 이유는 그 상사란 놈이 잘하는 게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해도 엉성하기 그지 없고, 인사이트도 없고, 리더십도 없어서 우러러 볼만한 무언가가 하나도 없었다. 그저 10년차 상사라서 계급이 높고, 연봉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것 외엔 볼 게 없는 양반이었다. "대체 10년동안 뭘 한거냐"라는 질문이 턱끝에서 맴돌지 않았을까 싶다. 저딴 인간이 되기 위해 이 곳에 10년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가?
알고보면, 정말 자세히 알고보면 그 상사에게는 '아랫것'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신묘한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운과 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올라가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신묘한 재능이란 것이 단순히 회사내의 정치술(aka 왕좌의 게임)이고, 정작 다른 곳에서는 써먹을 수도 없는 한심한 기술이라면? 그 기술은 회사원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들어주는가?
그 신묘한 재능이 정말 신묘하고 진귀한 재능일 수도 있다. 장인이 작품에 투사하는 디테일은 아마추어들이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 있으니까. 그러거나어쨋거나 친구는 10년차 상사와 같은 존재 혹은 그와 유사한 존재가 되길 거부했고, 그 10년차 상사는 "너는 지금 10년 뒤 너의 모습을 보고 있다"라는 말을 통해 친구의 퇴사를 더욱 부채질을 했다. 이곳을 빨리 벗어나라는 10년차 상사의 큰 그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전략- 자아실현
친구는 전략-마케팅에 관심이 많다. 현재 회사에 들어오기 전부터 전략에 관심이 많아서 매킨지, 베인앤컴퍼니 등 컨설팅 회사에 입사하는 것을 고려했었고, 지금은 사내에서 전략기획팀에 속해있다. 그런데 전략기획팀에서의 전략이랍시고 만드는 것들은 전략이라고 하기에 미안한 수준의 무엇이었다.
전략이라고 하면 시장 분석과 더불어 지금까지 회사가 수행해오고 있는 기획들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 지를 반성하는 모든 행위 등을 포괄하는 무엇일텐데, 이놈의 전략기획팀은 시장 분석을 따로 하는 것은 없고 삼성경제연구소나 현대경제연구소의 아웃풋만을 소스로 기획을 하기 일수였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원들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따로 연구를 하고 데이터를 생산하는 데는 게을렀다.
회사 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은 '하던대로 하자'라는 식이어서 기획자가 재량을 부릴 틈이 없었고, 재량을 부려봐야 회사 내에서 입지가 좋아지지도 않았다. 회사 내에서 가장 바람직한 인재상은 하던대로 하는 것에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무난하게 묻어가는 시다바리와 다름 없는 존재였다. 이런 회사에서 친구는 '전략'을 할 수 없고, 자아실현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한편, 회사는 꾸준히 매출이 나온다. 전략을 제대로 수립하지 않음에도 매출이 나온다는 건 지금까지의 전략이 여전히 실효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그리고 얼마나 이 나라가 대기업에 편리하게 설계가 되어있는 지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회사 입장에서 전략을 수립하지 않는 건 어찌보면 꽤나 합리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건 회사와 회장의 입장일 뿐이고, 한 회사에 속한 사람의 입장에서 이는 딱히 좋을 건 없다. 특히나 꿈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이런 게으르고 일도 주지 않는 회사는 자아실현의 기회는 주지도 않고 시간은 뺏으면서 돈만 줄 뿐이다.
하루하루 똑같은 루틴을 돌며 살아가는 것에 만족한다면 이런 회사는 확실히 꿈의 직장이다. 일이 별로 없어서 야근도 안하는데 돈은 짱짱하게 나오고, 회사의 네임밸류도 있어서 페이스북 프로필에 "xx그룹"이라고 걸어놓으면 뽐내기에도 좋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이런 거에 만족하는 건 아니니까.
친구의 퇴사는 사치일 수 있다:
돈의 문제
친구의 고민은 어떤 이들이 보기엔 사치일 수 있고, 친구 역시 이를 인정했다. 예를 들어 대학(원) 등록금을 위해 대출을 받은 자들처럼 갚아야할 빚이 있는 자들은 친구와 같은 선택을 하기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다. 그런데 이 친구는 갚아야할 빚이 없고, 딱히 돈이 급한 상황도 아니다.
퇴사로 인해 생기는 돈의 공백은 친구에게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단 친구놈의 부인이 한국의 흔한 직장인 연봉은 씹어먹을 정도로 돈을 어마무시하게 잘 벌어서 남편을 먹여살리기에 부족함이 없고, 애도 없어서 양육에 들어가는 비용이 있는 것도 아니다. 친구에게 "너가 돈 안벌어도 먹고 살만하지?"라고 물어보니 "풍족하게 살 수 있지"라고 답해왔다.
이 친구가 배부른 소리를 하는 거라고 비판하는 자들이 있을 거란 생각은 든다만, 딱히 그런 비판자들에 반응해주고 싶은 생각은 없다. 충분히 가진 자도 자신에게 합리적인 선택을 할 권리가 있으며 그 권리는 존중받아야한다. 게다가, 진정 문제삼아야하는 건 '배부른 고민을 하는 자'가 아니라, 누구나가 이런 고민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일 거다. 이 지점에서 '배부른 고민을 하는 자'를 비판하는 건 그냥 꼬인 사람일 뿐이고.
지금 친구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건 "얼마나 돈을 벌 수 있느냐"보다는 "얼마나 내가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게끔 조직이 도와주는가"다. 그런 점에서 친구는 현재 자신이 속한 조직이 자신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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