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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우 Mar 05. 2017

[독서 모임] <카인> 발제- 박현우

2017년 3월 4일 토요일, 두번째 독서모임이 끝났다. 첫번째 모임 때는 알랭 드 보통의 <뉴스의 시대>를 했고, 두번째 시간에는 주제 사라마구의 <카인>을 했다. 독서 모임에서 다루는 책의 순서는 각자가 추천한 책들을 한 곳에 모은 뒤 제비뽑기를 하며 정했는데, 공교롭게도 내가 추천한 책들이 초반에 많이 잡혔다. <뉴스>나 <카인>이 필자가 추천한 책이기 때문. 돌아오는 시간에는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를 하는데, 그 책도 내가 추천한 책이다. 


앞으로 발제문을 쓰면, 그 발제문은 이 브런치에 계속해서 업로드할 예정이다. 녹음도 하고 있긴한데, 익명으로 유튜브에 올리는 것도 고려 중이다. 조횟수 장사를 하려는 건 아니다, 유명인들도 아닌 자들의 독서 모임 내용을 담은 영상이 조횟수가 나올리가 만무하다. 다만, 유튜브는 그 자체로 괜찮은 무료 클라우드다. 


발제문의 형식은 딱히 정해두지 않았다. 발제자가 알아서 하면 될 듯 하다. 발제는 각자가 추천한 책을 하기로 했는데, 그러다보니 내가 발제를 계속 하게 됐다. <뉴스의 시대>는 모임에 앞서 2일만에 결정됐기에 발제는 시간상, 혹은 나의 게으름 때문에 하지 못했다. 아래는 <카인>에 대한 발제문인데, 모임 후에 붙인 내용도 있음을 밝힌다. 





카인의 낙인

-카인의 낙인에 대한 여러 가설

첫번째 설, 카인이 쉽게 죽을 수 없으므로 그 평생동안 최초의 살인자로 낙인이 찍히고 평생 고통받으며 살았으리라는 것이고, 이게 궁극적인 형벌이라는 설이 있다.

두번째 설, 후대의 신학 해석에선 '죄인조차도 하느님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는다'라는 훈훈한 의미로 해석한다.

세번째 설, 역사학적으로는, 산 제물(= 아벨)을 신에게 바친 사제(= 카인)가 그 피를 흘리게 한 죄를 닦는 정죄 기간 동안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있고, 그 정죄 기간 동안 보호를 받을 수 있는 표식을 받는다는 바빌로니아의 관습이 성경에 융합된 거라는 설도 있다. 나름대로 설득력은 있는데 일단은 설이다.

네번째 설, 카인이 죄인일 지언정 어쨌든 누군가 그를 죽이는 것 또한 또 다른 '살인'이라는 죄를 범하는 것이 되므로 그것을 막기 위해 그랬다고 볼 수 있다.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카인>에서 카인에게 새겨진 낙인은 시간이 지날 수록 점점 커진다. 그 이유가 뭘까?

위에서 언급한 설은 이 소설에 대입되지 않는다. 카인이 딱히 이 낙인 때문에 고통스러운 삶을 살지는 않는다(1). 오히려 부족한 것 없이 살고, 딱히 시련도 겪지 않는다. 하나님의 훈훈함을 보여주기 위해 낙인이 존재하는 것 같지도 않다(2). 소설 속에서 하나님은 무자비하다. 카인을 일종의 사제로 묘사하지도 않는다(3). 카인은 신에 복종하는 인물이라기보다는 보다 인간 자체에 애정을 가지는 인물로 보인다. 이는 마지막에 홀로 선 인간으로서 신과 대면하는 장면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또다른 인간의 죄를 막고자 카인에게 낙인을 씌운 것 같지도 않다(4). 살인을 막고자 카인에게 낙인을 씌운 거라면, 카인이 신의 의도와 반대되게 노아의 가족들을 살인한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카인-인간을 죽이는 게 죄라면, 카인이 다른 인간을 죽이는 것도 죄일 것이다. 낙인이 어떤 종류의 살인도 예방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면 카인이 살인을 못하게끔 하는 기능도 했어야했다.


네번째 설에 대해선 다른 식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카인-신에 의해 낙인받은 자를 죽이는 것이 일반적인 인간을 죽이는 것보다 더욱 큰 죄일 수도 있다. 카인은 신에 의해 운명이 정해진 자이기에 일반적인 인간이 감히 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카인을 죽이는 일은 있어선 안된다. 그런 의미에서 낙인은 ‘그런 큰 죄’를 방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다. 감히 신의 뜻을 거스르지 말라는 거만하기 짝이 없는 의미로다가. 이렇게 낙인을 설명하면 <카인>의 낙인도 어느정도 이해된다. 신은 과연 그렇게 거만하기 짝이 없게 그려지고 있으니까.


네번째 가설로도 어느정도 카인의 낙인이 설명은 되지만, 발제자(박현우)가 생각하기에 <카인>에 등장하는 카인의 이마에 새겨진 낙인은 카인의 신에 대한 증오가 커짐에 따라 함께 커지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한다. 신에 대해 의심을 품던 카인의 이마에는 그다지 크지 않은 낙인이 새겨져 있었지만, 신을 믿지 않았다는 이유로, 죄인이 몇 명이 있었다는 이유로 죄도 없는 아이들을 학살했다는 이유로 신에 대해 의심, 아니 더 나아가 분노를 함에 따라 낙인은 더욱 커져 간다. 흥미로운 것은 여호와가 카인과 같은 공간에 있었을 때도 카인을 발견하지 못한 적이 있다는 건데, 이는 신이 자신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한 인간에 대한 무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런 여호와의 무지는 복선이 되는데, 결국 신에게 분노했던 자는 신의 명령을 수행하던 노아를 포함한 노아의 일가족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결국 인류를 리셋하려던 신은 자신이 미처 보지 못한 카인에 의해 실패한다. 


모임 후) 카인의 신에 대한 의구심이 커져가자 더 큰 낙인-부적을 남긴 건 아닐까 하는 이야기도 나왔다. 제압을 하기 위해선 더 큰 부적(?)이 필요하니까.


카인의 정체, 카인의 후예

"알 수 없는 이유로 차별대우를 받았다는 점, 농사꾼이었다가도 동시에 땅으로부터 저주를 받았다는 점, 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추방만 당하고 목숨은 철저하게 보장받았다는 점, 사람을 피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하고 도시를 만들고 일족을 형성했다는 점 등, 이처럼 카인의 일생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순으로 점철되어 있다.”(나무위키)


위는 나무위키에서 따온 내용이다. 위와 같은 이유로 카인을 괴물로 묘사하기도 한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하면 모순들이 깔끔하게 설명되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차별대우를 받고, 농사꾼이었으나 저주를 받고, 죄인임에도 목숨을 보장받고, 또 사람을 피했음에도 일족을 형성했다는 것이 설명되려면 카인이 괴물이면 된다. 괴물이라면 알 수 없는 이유로 차별대우를 받았을 것이고, 사람을 피하면서 괴물과 교접하며 일족을 꾸릴 수 있으니까. 


그런데 <카인>에선 위와같은 설명이 적절하지 않을 듯 하다. <카인>에서 카인은 누구보다도 인간을 대표하는 듯 보이기 때문에 괴물일 수는 없다(그런 인간이 인간을 멸종시켰다는 게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카인을 괴물로 묘사하는 측은 아무래도 카인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괴물로 묘사한 것이 아닐까하는데, 카인이 신에 뜻을 거스르는 행위들을 <카인>에서뿐만이 아니라 다른 스토리에서도 반복해서 해왔다면 충분히 납득 가능하다. 신앙심이 깊은 자들은 신에 대항하는 자를 정상적으로 묘사하고 싶어하진 않을테니까.


방주에 타지 못한 일각수

노아의 방주가 천사에 의해 하늘을 날게 될 때, 카인은 일각수-유니콘을 발견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일각수는 다시 시야에서 사라진다. 방주에 타지 못했으니 아마 그 일각수는 죽음을 맞이했을테고, 아마 소설에서도 나왔듯이 방주를 타게 되었더라도 암수가 함께하지 않았으니 씨앗을 만들지는 못했을 거다. 발제자의 궁금증은 왜 갑자기 일각수가 나타나고 또 금방 사라졌냐는 건데, 속시원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 부분은 함께 이야기를 나눴으면 싶다.



모임 후) 모임 중에 일각수가 신이 아닐까 하는 의견이 나왔다. 뿔이 하나 뿐이고, 홀로 존재하기 때문에 여러모로 신을 상징하는 상징들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카인>에서 신은 전능하지 않다. 해를 멈춰달라는 요청에 신은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이라 답한다. 신조차 모든 자연 현상에 개입 할 수 없다고 한다.


일각수가 야훼라면 이 장면은 꽤나 흥미로워진다. 홍수가 야훼에 의해 발생했는 지도 이제 애매해지지만-신은 그저 예측을 했을 수도 있다-야훼가 설사 그 홍수를 일으켰다하더라도, 시간 계산을 잘못했는지 결국 방주에 타지 못했다는 건 야훼가 꽤나 결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상징적인 죽음을 맞이했다는 거다. 

방주가 육지에 도착했을 때 카인이 야훼와 마주하긴하지만, 유니콘의 죽음은 어쨋거나 상징적인 것이므로 유니콘의 죽음 뒤에 야훼가 등장하는 것은 별로 이상할 것은 없다.


전설에 따르면 유니콘은 처녀를 좋아했고, 사냥꾼들을 처녀를 미끼로 유니콘을 사냥하곤 했다고 한다. 그래서 유니콘은 순결을 상징하기도 하는데, 처녀를 밝히는 이런 유니콘이 방주에 타지 못했다는 건, 순결을 따지는 신의 죽음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순결에 대한 종교인들의 집착은 예전만하지 못하니, 뭐 그런 현실을 보여주는 걸지도. 그럼에도 아래와 같은 이미지는 있다. 어떤 이들에겐 여전히 순결이 중요한 듯 하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충성

모임 후) 야훼를 지배자로 그리고 인간을 피지배자로 보는 관점이 소설에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럴만한 것이, 야훼는 자신을 의심하거나 명령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자비없이 굴었고,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자들에 대해서는...에, 딱히 뭘 해준 것 같지는 않다. 한 예로 욥은 야훼에 대해 충성을 맹세했지만, 사탄이 '욥은 배신할거다'란 말을 하자 신은 '아닐걸?'하며 욥에게 온갖 시련을 내린다. 충성 테스트를 한답시고 욥의 자식들을 죽이고, 재산은 씨를 말린다.


<카인>의 카인은 이 지점에서 야훼에게 의문을 품는다. 욥은 당신에게 충성했는데 왜 이런 시련을 당해야하느냐고. 야훼의 대답이 꽤나 재밌다. 야훼에 따르면 욥은 전보다 많은 자식을 거느리게 되었고, 전보다 많은 재산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야훼에 따르면 이는 충분한 보상인 듯 하다. 당연하게도 독자들은 '이미 죽은 자식들은?'이란 물음표를 떠올릴 것인데, 자식을 일종의 '노동력'으로만 본다면 야훼가 내려주는 보상은 이해가 안될 것도 없긴 하다. 노동력을 이유로 근친상간까지 허용하는 동네인지라.


야훼에 관한 이야기들은 이렇듯, 충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당시에 지배자들에게 중요했던 가치가 충이었기에 이런 식의 스토리들을 많이 만든 것이 아닌가 한다. 야훼에게 바쳐야할 재산을 횡령하는 놈-아간이 등장하는 스토리는 지배자의 재산을 삥땅치지 말라는 메세지로 읽힌다. 박정희가 이순실팔이를 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랄까. 충성하고, 삥땅치지 말거라.


지배자와 피지배자- 노동력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근친상간

모임 후) 야훼는 소돔과 고모라에는 죄인이 많다벼 갓 태어난 아이들까지 몽땅 죽여버렸다. 그 동네에는 동성애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동성애를 죄로 본 것이다. 그런데 바람피는 자나 근친상간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벌을 내리지 않았다. 동성애를 죄악시한 것은 동성애가 노동력을 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인 듯 하고, 근친상간을 허락한 이유도 같은 맥락인 듯 싶다. 지배자의 입장에선 머릿 수가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현대로 오면 동성애를 노동력을 이유로 죄악시하는 건 많이 웃겨지는데, 지금은 노동력보다 중요한 것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한 예로 양육의 책임을 동성애 부부가 질 수도 있게 되었으니, 당시와는 다른 분위기를 볼 수 있다. 물론 아직도 야훼의 이데올로기에 빠져서 동성애를 죄악시하는 조선인들이 많긴하지만.


나중에는 동성애뿐 아니라, 근친상간이나 불륜이 죄악시되는데, 시대가 변해가면서 개인재산이 중요해짐에 따라 그런 가치가 중요해진 게 아닐까 싶다. 어쨋거나 종교는 값싸고 좋은 통치 수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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