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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우 Jun 03. 2017

<꿈의 제인>: 꿈에서야 이루어지는 꿈

케이크는 나눠먹자.

스포일러 주의. 그리고 이 글은 이 영화를 본 사람을 대상으로 쓰였기에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글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아래부터는 문어체입니다. 시작합시다.


제인


불친절한, 해석에 열려있는

<꿈의 제인>은 불친절한 영화다. 불친절한 영화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설명이 너무 부족해서 이도저도 안되는 것이 하나이고, 설명이 부족함에도 세계가 그럴듯하게 구성되어있어 해석에 열려있는 영화가 또 하나다. 개연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영화가 전자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고, 설명은 빈약하지만 세계가 그럴듯하게 구성되어 있어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이 가능한 <곡성>이나 이 글이 소개할 <꿈의 제인>이 여기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전자와 후자의 영화를 구분하는 엄밀한 방법론을 찾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설령 이 둘을 구분하는 방법론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결국엔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검증해야되는 번거로움이 따를 것이기에 애초에 방법론을 찾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영화들은 그것이 얼마나 형편없이 만들어지건 각각의 고유성을 가지기에 특정 영화의 특징을 밝힐 때나, 두 영화를 비교할 때나 그때 그때에 적합한 논리와 수단을 강구해야한다.


제인과 소현

이 영화는 불친절하다. <꿈의 제인>은 관객들에게 퍼즐들을 부족하게 나눠주기도하고, 심지어 부족한 퍼즐 조각은 서로 아귀가 맞지도 않는다. 영화에는 현실의 조각이 있고, 주인공 소현의 꿈의 조각도 있기 때문이다. 조각을 억지로 맞추려고 하면 퍼즐은 찢어질 수 밖에. 주어진 퍼즐만으론 타임라인조차 완벽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가령, 주인공 소현이 트랜스젠더(?) 제인과 함께 살 때에는 소현과 지수는 서로 아는 사이다. 제인과 거주할 때가 타임라인상 먼저라고 가정한다면 소현이 양아치팸에 합류한 때에 지수와 만날 때 서로 모르는 것이 성립할 수 없다. 반대로 소현이 양아치팸에 머무른 게 먼저라면 양아치팸의 원숭이 아빠에 의해 강간을 당하게 되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지수가 나중에 제인과 함께 거주할 때 살아있는 게 말이 안된다. 두 개의 현실이 서로 맞물리지 못한다면 한쪽은 꿈일 수 밖에. 어느 쪽이 현실인지 꿈인지는 알 수 없다. 이 글을 보는 님의 뜻대로 정하시면 된다. 영화가 나온 이상 감독의 코멘트도 의미 없다.


데자뷰

"꿈"이란 단어는 단 한번도 영화에 나오지 않지만 제목에서부터 "꿈"을 달고있어서인지 영화는 어디서 본 것 같은 장면들-데자뷰를 계속해서 보여준다. 영화 초반부에 소현이 모텔에서 오빠를 기다릴 때 그는 욕실에서 손목을 긋는다. 이후, 방을 두들기며 문틈으로 얼굴을 보인 제인은 소현을 보며 "너 손목에 피나"하면서 손목에 붕대를 감아주고 거기에 "X"를 그어준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에 라이브바를 벗어난 소현을 불러세우던 제인은 손목에 "UNHAPPY"라고 양각되어있는 도장을 찍어주고 담배 연기를 손목에 '후'하고 불어준다.


제인이 없어진 라이브바에 찾아간 소현은 갈 곳이 없어 한 직원에 집의 거실에서 하룻밤을 머물게되는데, 그 집은 소현과 제인이 함께 머물던 공간과 뭔가 닮아 있다. 함께 영화를 본 분에 의하면 그 집에 병상도 있었다고 하는데(난 못봤다), 이 병상은 제인이 환자일 당시에 있던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런식으로 퍼즐들을 모으다가보면, 영화의 일부는 주인공 소현에 의해 만들어진 어떤 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Life of Pie>


다른 영화 이야기를 잠시 해보자. <Life Of Pie 라이프 오브 파이>(이하 <LOP>)라는 영화의 스토리는 주인공 파이 파텔에 입을 통해 전해진다. 주인공을 통해 이야기가 전해진다는 건 주인공에 의해 해석되거나 조작된 현실 혹은 주인공이 더 믿고싶어하는 현실이 관객에게 전해진다고 봐도 무방하다.


<LOP>의 후반부에 결국 파이가 전한 흥미롭고도 신비로운 모험은 현실과 많은 부분에서 다르다는 것이 한 인물에 의해 주장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이의 이야기를 관객이 믿지 말아야할 이유는 없고, 그 과정에서 파이가 겪고 배우는 어떤 교훈을 관객이 공감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애초에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픽션 영화를 보고도 우리는 눈물을 흘리곤 하잖는가.


<꿈의 제인>도 <LOP>와 마찬가지로 한 인물에 의해 이야기가 전달된다. 주인공 소현을 편지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전해준다. 편지의 수신자가 누군지는 영화상에 나오지 않지만, 어쨋거나 관객은 그 누군가가 되어 소현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아마도 소현의 희망이 섞인 어떤 현실을 듣게 될 것이다.


현실이 아니기에, 꿈이기에 가능한 시시한 행복

제인은 거창한(?) 행복은 바라지도 않는다. 행복이란 놈은 삶에 소소하게 등장하고, 그마저도 시시하게 자리잡은 뒤 언제 와있었냐는 듯 사라진다. 그런식으로 인생은 계속되기에 삶은 시시한 것이고, 그 안에 시시한 행복만을 추구하는 게 바람직한 것이라 생각한다. 오랫동안 유지되는 한 껏 행복한 무엇은 현실에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기에 시시한 행복이나 추구하자는 거다.


트랜스젠더 제인은 삶에 어떤 결핍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그에게 여성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봉긋한 가슴이 없어서인지, 자신을 사랑해주던 애인이 말없이 사라져서인지 알 수 없다. 어쨋거나 그런 결핍을 해소하기 위해 그는 자신에게 필요도 없는 물건들을 집어오고, 애지중지한다. 삶의 고통을 잠시 잊게해주는 화려한 불빛의 미러볼은 그 중 하나이고, 가족이 없는 친구들을 집에 들이는 것도 그런 이유일 거라 생각한다.


지수

미러볼과 항우울제로 삶의 고통을 외면하던 제인은 자신과 거리를 두려한다는 전 애인의 근황을 전해듣고는 결국 높은 곳에서 몸을 던진다. 후에 갈 곳 없던 주인공 소현은 양아치팸에 가게 되는데, 거기서 동경하고 의지하던 지수도 곧 이어 자살을 하게 된다. 소현이 지수를 처음 본 것은 아마 지수가 양아치팸에 새로 합류할 때였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인이 살아있던 당시에 소현과 지수가 함께 거주했던 건 아마 가장 행복했던 시절에 지수라는 기억을 소환했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나는 추측한다).


아마도 그게 소현이 생각하는 소소한 행복이 아니었을까 싶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다같이 둘러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 후에 제인이 소현만을 위해 노래하는 장면 역시 소현에 의해 가공된 기억일지도 모르겠다. 그 곡을 기점으로 함께 살게됐을 수도 있기는 하다만, 이 영화에서 그런 디테일이 뭐가 중요하랴. 제인은 스스로 소수자이고 약자임에도 불구하고 상처받은 영혼들을 돌보려했고, 그로 인해 삶에 잠시나마 시시한 행복을 얻었던 영혼-소현은 제인을 자신의 구원자로 기억했다. 그 기억이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다. 함께 행복하자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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