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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우 Nov 12. 2017

<리빙보이 인 뉴욕>: 스스로 진실되지 못했던 사람들

#브런치무비패스 #감사

스포일러 주의

뉴욕이라는 도시를 상상할 때 흔히 따라오는 형용사들이 있다. "에너제릭", "새로운", "열정적인"등등. 뉴욕을 가본 적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뉴욕을 에너제릭하면서도 새롭고 열정적인 도시로 느끼게 하는 데에는 예술가들의 공헌이 컸다. 여전히 많은 영화와 드라마들은 뉴욕이란 도시를 배경을 삼으면서 매번 이 도시가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성토한다. 그런데 마크 웹의 <THE ONLY LIVING BOY IN NEW YORK>은 다르다. 이 도시의 사람들이 얼마나 허영에 찌들어있는 지를 보여준다. 이는 영화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다. "THE ONLY LIVING BOY IN NEW YORK"...유일하게 살아있는 뉴욕에 사는 보이. 나머지들은 "LIVING"하고 있지 않다는 감독 마크 웹의 독설이 들리지 않나? 제목에서부터 선전포고 하더니 이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허영에 찌든, 그리고 스스로에게 진실되지 못하며 허겁지겁 살아가는 인생들을 보여준다. 한국 영화사는 이 영화를 <리빙보이 인 뉴욕>으로 수입해왔다. "ONLY"가 빠진 것. ONLY가 빠지면 안되는데 말이지.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어딘가에 속박되어있어서 자유롭지 못하고, 원하는 게 있음에도 주저한다. 주인공 토마스 웹은 작가의 꿈을 가지고 있지만 아버지에 의해 그 꿈이 꺾였다. 하지만 아버지를 탓할 수만도 없다. 꺾인 것은 주인공의 죄이니. 아버지 에단 웹은 부인 주디 웹 외에 사랑하는 사람-조안나가 있지만 어쩔 수 없이 함께 살고 있고, 주디 역시 사랑하는 남자-제랄드가 따로 있지만 어쩔 수 없이 그와 함께 살고 있다. 이 부부가 어쩔 수 없이 부부 관계를 유지하는 이유는 평판 때문이다. 그 어떤 부부보다도 완벽하게 지낸다고 알려진 이 부부는 자신들이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는 걸 밖에 밝히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래서 에단 웹은 조안나라는 한 여인과 바람을 피우고, 주디 웹은 한 장소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제럴드의 책을 읽는다. 그들이 바라보는 조안나나 제럴드가 그래서 막 엄청 삶을 진실되게 살고 있냐, 하면 또 그렇지도 않다. 


주인공이 극복해야할 대상은 아버지다. 아버지에게 소설을 보여줬을 때 "그럭저럭 괜찮네"란 평을 듣고 주인공은 꺾여버렸다. 아버지를 극복할 때 그는 글을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사실 여기까지는 흔한 스토리다. 자식의 재능을 인정해주지 않는 부모를 등장시킨 스토리가 한 둘인가? 하이틴물에서 흔하디 흔한 스토리고, 하이틴물도 아닌 <죽은 시인들의 사회>에서도 그런 부모가 등장하기도 했다. 감독 마크 웹은 흔하디 흔할 수 있는 부자간의 관계를 좀 더 스페셜하게 만들기 위해 한 캐릭터를 추가한다. 조안나. 



조안나는 케이트 베킨세일이 연기했는데, 케이트 베킨세일이 이 영화에 캐스팅된 이유는 두 가지가 아닐까 싶다. 그의 연기력과 미모. 아빠 에단 웹과 연애를 하면서도 아들 토마스 웹의 관심을 이끌어내려면 중년이면서도 청년들을 유혹할 매력을 지니고 있어야하는데 케이트 베킨세일만한 배우가 또 없다. 그리고 역시나 이번 영화에서도 그는 뛰어난 연기를 보여줬다. 늑대인간 때려잡는 거 그만하고 드라마 장르 작업 많이 해주시면 감사할 것 같다.


여튼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면, 조안나 때문에 영화는 비로소 흥미로운 틀을 갖추게 된다. 평범했던 부자관계가 특별해지고, 아들은 조안나를 통해 성장한다. 아버지와 연애하는 여자와 자고 싶냐는 물음에 '그게 말이 되냐'고 답을 하던 토마스 웹은 그녀에게 키스를 하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 토마스의 선택 때문에 한국 관객들은 이 영화를 많이 비난하고 있기는 하다. 왓챠에서 가장 좋아요를 많이 받고 있는 한줄평이 "사랑과 전쟁 in 뉴욕 (by 마크 웹)"인걸 보면 뭐. 한국의 전통적인 가족관, 연애관, 사랑관을 이 영화에 들이대면 영화는 당연히 막장 드라마로 밖에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가족이라는 틀을 제외하고 이 세 인물의 관계를 보면, '문제'될 건 없다.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만나는 것일 뿐이니. 필자는 이 셋의 관계를 윤리적으로 문제삼을 생각은 없다. 


걸리는 게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조안나가 왜 아들 토마스 웹과 관계를 가지느냐는 것. 조안나는 아빠 에단 웹을 정말 사랑하는 듯이 그려지고, 결국 에단 웹과 조안나는 행복한 커플이 되어 행복하게 살게 된다. 그런 조안나가 왜 굳이 그 관계를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아들 토마스 웹과 관계를 가지는 지는 이 영화에서 충실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냥 자신과 자고 싶어하는 남자라는 이유로? 이런 설명은 너무 빈약하고, 마지막에 에단 웹을 선택하는 조안나와 모순된다. 그런데 조안나가 토마스와 연애를 하지 않으면 영화 자체가 성립하지 않게 된다. 


영화에 직접 등장하는 설정은 아니지만 내가 애써 설명을 붙여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조안나는 아빠 에단 웹과 연애를 하고 있지만 에단 웹은 주디 웹과 부부사이다. 그러니 에단 웹과 조안나의 관계는 언제 깨져도 이상하지 않은 불안한 상태다. 불안한 관계는 세컨드에 대한 욕구로 발전되었을 것이고, 그러다가 눈에 띄인 토마스 웹과 관계를 가졌다면 아예 말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하지만 이런 논리로도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 것은 수많은 남자들이 가능했을텐데 왜 하필 데이트 상대의 아들이냐는 것).


유부남과 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바로 발을 뺄 수 있는 편리한 연애를 선호한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앞에서 말했듯 이 영화의 모든 인물들은 무엇으로부터 도피하고 있는데, 조안나도 예외는 아닌 것이다. 관계가 진지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조안나가 토마스 웹과 가벼운 연애를 하는 것은 그런 이유일 수 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날 때쯤엔 조안나 역시 다른 모든 인물들처럼 두려움을 극복하고 진지한 관계를 시작한다. 싱글이 된 에단 웹과 진지한 연애를 하는 것.


조안나라는 캐릭터를 설명하는 게 이렇게 지지부진한 것처럼, 영화가 전체적으로 비비꼬아놨다는 인상은 받았다. 그런데 그 비비꼼이 효과적이었는 지 모르겠다. 웹 부부와 제럴드의 관계도 그러하고, 웹 부자와 조안나의 관계도 그러하다. 이런 설정은 "뉴요커들은 living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인데, 불임인 부부가 친구에게 성관계를 부탁한다는 설정이나(그날 섹스 한번하고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나), 부자 모두와 섹스를 하는 여성이 그리는 삼각 관계가 뉴요커를 과연 대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메세지는 좋았으나 스토리가 메세지를 강화하기에 좋은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굳이 영화의 짜임새를 다루자면 그렇단 것이고, 난 이 영화가 좋다. 영화가 따뜻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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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의 성이 웹인 것과 이 영화의 인물들이 토마스 웹, 에단 웹, 주디 웹인 것은 과연 우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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