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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우 Dec 07. 2017

페미니즘을 '무엇'으로 정의내리는 문제


무엇을 무엇이다로 정의(definition)내리는 문제에 있어서 현재 가장 뜨거운 감자는 페미니즘(feminism)이 아닐까 한다. 많은 사람들이 페미니즘이 무엇인지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만, 그 사람들은 합의에 이르지 못한다. 합의에 이르지 못하니 결국 페미니즘에 관한 논쟁은 끊이없이 지속된다. 18세기에 만들어진 이즘(ism)치고 2017년인 지금까지 이토록 뜨거운 감자인 이즘이 또 어디있나. 페미니즘이 유일하다.


엄밀히 말해 이즘은 아니지만, 민주주의(democracy)에 대해서도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논쟁이 가열차진 않다. 민주주의에 대한 논쟁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쟁보다는 어떻게 민주주의가 애초 의도대로 작동하게끔 만들 것이냐에 방점이 찍혀있다. 민주주의가 이미 그것과 비교될 수 있다는 다른 체재들에 비해 앞도적 우위를 지니고 있어서 토론 자체가 무의미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확인받기 위해 굳이 우리가 고등학교 때 윤리 교과서에서 슬쩍 봤던 후쿠아먀 교수 아조씨를 인용할 필요는 없다.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데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 게 카테고리와는 맞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는데, 대부분의 이즘들은 페미니즘과 마찬가지로 모두 정치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있다. 이즘들이 정치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사회 및 대중들이 지향하는 정치적 방향과 일치할 때 이즘도 흥하고, 대중들과 멀어질 때 이즘들은 또 새로운 이즘에 밀려 관심에서 멀어진다. 구조주의가 후기구조주의에 인기를 빼앗기고, 공산주의가 민주주의에 인기를 빼았겼듯이.


페미니즘은 이즘으로서 꽤나 흥미로운 지점이 많다.

하나, 꽤나 역사가 긴 이즘임에도 여전히 그 인기가 가실 줄을 모른다는 것. 이즘들은 대체로 시간이 지나면 생명이 다한다. 그런데 페미니즘의 인기는 그것이 생긴 이래로 꾸준히 늘고 있다. 영역 확장을 하는 것은 덤.


둘, 이름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 페미니즘은 그 내용이 바뀐 새로운(?) 페미니즘이 나타나도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 페미니즘이 된다. 페미니즘이란 이름을 고수하면서 시대에 따라 그 내용을 달리한다는 점이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깊숙히 들어가보면 페미니즘 내에도 계가 갈린다(갈리는 것인지 외부인이 가르는 것인지는 알아서 판단하라). 1~4세대 페미니즘으로 페미니즘을 가르기도 하고, 요구하는 메세지에 따라 에코 페미니즘이니 급진적 페미니즘이니 하면서 또 나누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종류의 페미니즘들도 결국엔 페미니즘으로 포섭된다는 게 꽤나 재미있는 부분이다. 결국 xxx 페미니즘을 한다고 카테고리화된 사람들을 모아놓고 "당신은 페미니스트입니까?"하고 물으면 모두가 "그렇습니다."라고 할테니까. 


셋, 누구나가 논쟁에 참여한다는 것. 사실상 거의 모두가 페미니즘이란 이즘에 관심을 두고 있다. 학자들만이 현학적인 대화의 소재로 삼는 이즘도 아니고, 그렇다고 대중들만 다루는 이즘도 아니다. 학자, 대중 구분 없이 모두 논쟁에 참여하고 관심을 가진다. 또, feminism이란 이름에 무색하게 남성과 여성 모두가 이 이즘에 관심을 가지고 '무엇이 페미니즘이며, 페미니즘은 무엇이어야하는가'에 관한 논쟁에 참여한다. 남성과 여성으로 분리해서 서술하는 이유는 남성과 여성이 페미니즘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각각 다른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을 정의하는 문제

페미니즘을 정의하는 문제에 있어서 일종의 대대적인 정리 내지 합의가 되지 않는 이유는 페미니즘이 어떤 거대한 권력의 어그로를 끌 수 밖에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페미니즘을 어떻게 정의내리느냐에 따라 페미니즘은 온 동네방네에 얽힌 파괴적인 이즘이 될 수도 있고, 어떤 분야와도 무관한 그들만의 이즘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페미니즘은 가급적 얽히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고 필연적으로 어그로를 끌게 된다.


페미니즘이라는 하나의 밈(meme)은 사이즈가 점점 커지고 있다. 페미니스트들이 무슨 대단한 권력을 가지고 싶어서 영역 확장을 꿰한다기보다는, 실제로 여성들이 차별을 받는 영역이 전방위적으로 펼쳐있기 때문이다. 취업, 승진에 있어서 여성이 차별을 받는 부분, 미디어에서 여성들이 성적으로 대상화되거나 소모품으로 활용되는 부분 등만 예를 들어도 이미 사이즈가 어마무시하다. 기업 문화와 예술-표현 문화까지 벌써 걸려버린다. 즉, 페미니즘의 영역 확장이 이루어지는 이유는 차별로 인식되지 않던 것들이 차별로 인식되면서 분야 확장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한편, 페미니즘이 영역 확장을 할 때 변화를 요구받는 이들은 이를 반기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기득권을 인지하고 있고 그 기득권을 잃고 싶지 않아서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라는 혹자들의 분석이 있기는 하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 그들은 자신이 기득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변화 그 자체라는 것이 불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 상황에 문제가 없으니 변화 자체가 필요없다거나 페미니즘이 주장하는 어떤 변화를 수용하게 되면 우리가 살아갈 사회가 더 큰 것을 잃을 지도 모른다는 식이다.


영역 확장이 이루어지는 와중, 영역 확장을 막아내려는 세력이 등장해서 페미니즘 논쟁에 참여한다. 영역 확장을 막으려는 자들은 말한다. "그건 페미니즘이 아니다"라고. 이들은 이 말을 함으로써 페미니즘이 무엇인지에 관한 논쟁에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된다. 페미니즘에 대해 꽤나 진지한 걱정을 많이 하는 듯한 그들이지만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죽어도 그렇게 되고는 싶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꽤나 흥미로운 사람들이다. 페미니즘이 무엇이 되어야하는 지에 대해서는 무지하게 관심이 많은데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절대 말하지 않는다니, 이런 아이러니가!


무엇이 페미니즘인가, 라는 논쟁에는 참여하지 않으면서 그 자체를 부정하는 세력들도 있기는 하다. 이들은 이퀄리즘이란 것을 내세운다. 여성만을 위한 세상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세상이 되어야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이런 식의 반동은 인권 운동에 있어서 사실 굉장히 흔하다. 


2012년 2월 26일, 샌프란시스코에서 Trayvon Martin이라는 17세 아프리칸 아메리칸-흑인이 George Zimmerman이라는 히스패틱계 남성에게 총을 맞고 사망한다. 당시 Martin은 비무장상태였으나 방범대를 돌던 Zimmerman은 그에게 총을 쏜 것. 이 사건을 계기로 Black Lives Matter 운동이 시작된다.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며 운동을 하는 와중, 그에 반기를 드는 이들은 광장으로 나와 이렇게 말한다. 

"All lives matter 모두의 생명은 소중하다"


이 문구들은 워낙 유명해서 각종 미디어에서 자주 다뤄지기도 한다. 흑인 인권 운동을 다루는 드라마 <Dear White peoples 친애하는 백인들에게>은 미국의 대학 사회를 다룬다. 한 학생의 집에서 파티를 하는 도중, "nigger"라는 가사가 들어간 음악이 나온다. 그 때 한 백인이 노래 가사를 따라 부른다. "니거 니거"하면서. 이때 그의 흑인인 친구는 말한다. "하지마.", "뭘?", "그거", "노래 가사인데?", "하지마"


결국 둘의 다툼은 더욱 격해지고 결국 학교 경찰이 파티장에 난입하게 된다. 그리고 경찰은 대뜸 흑인 학생에게 총을 들이댄다. 학생은 자신이 이 학교의 학생이라는 것을 증명해야되는 입장에 처해진다. 이 사건을 계기로 대학 내에서 "Black lives matter" 운동이 일어난다.


흑인들의 목소리가 대학 내에 퍼지자 백인들로 조직된 모임에서 맞불 시위를 놓는다. 그들이 내놓은 문구는 아래와 같다.


"Police lives matter" 경찰의 생명은 소중하다.


페미니즘에 관한 논쟁이 페미니즘에 가져올 변화

이런 종류의 온갖 논쟁들이 결국 페미니즘이라는 이즘 내지 밈에 해로울까?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의 위기는 페미니즘에 대한 공격이 강해질 때가 아니라, 페미니즘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이 사라질 때 온다.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한국 내에 유행처럼 퍼진 페미니즘에 관한 논쟁들은 결국 페미니즘이라는 이즘이 풍성해지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실제로 그 결과가 이미 지금 여기에 와있는 듯 와있는 듯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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