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있었어요"
여자P는 한 남자를 좋아했었다. 지금도 좋아하는 지는 모르겠으나, 더이상 사귀고 있지는 않다. 여자P가 사귀기 전부터 나는 여자P가 그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직접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정확한 이유는 몰랐다. 그래서 물었다. "뭐가 좋아?"
"멋있었어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뭐가 멋있었냐고 하니 키보드 두드리면서 문서 작업하는 게 멋있었다더라. 나는 그 남자가 어떤 문서 작업을 하는 지 알고 있는데, 사실 그 문서 작업이란 게 엄청난 능력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사실 중 하나는, 여자P도 똑같은 문서 작업을 할 수 있고, 똑같은 문서 작업을 하며, 이 사실을 그녀가 모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그 남자는 그 문서 작업을 여자P보다 더욱 오랜 시간해서 (아마도) 여자P보다는 뛰어나게 그 작업을 수행할 것이다. 하지만 이 차이는 그녀가 사랑에 빠진 이유를 그리 유의미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여자P는 왜 그 남자에게 관심을 가졌을까?
여자P는 특이한 케이스로서 이 글에 언급된 것이 아니다. 내가 여자P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남자의 어떤 부분을 '존경'하게 되고 이 존경이 이성적인 호감으로 발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여자P에 공감한다면, 그 흔하디 흔한 명제 "여자는 남자의 능력을 본다"에도 동의해야한다.
나는 그녀가 그에게 빠진 이유를 모른다. 정확한 이유는 여자P 본인도 모를거라 생각한다. 그녀는 내게 "존경할 수 있는 게 있어야하는 것 같아요"라고 했지만, 무엇이 그녀의 존경을 사는 지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못)했다. 확실한 것 하나는 여자P가 그에게서 '내가 못하는 무엇'을 발견했다는 것이고 그것이 이성적인 호감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내가 못하는 무엇'은 정말 존재했을까? 그는 정말 그녀가 못하는 것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을까?
환상이 존재했을 가능성
나는 여자P와 개인적인 이야기를 종종 나눈다. 그리고 여러 이슈에 대해서도 그녀와 이야기를 나눠본 일이 있다. 결론적으로 나는 그녀가 꽤나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재라고 생각한다. 일을 맡기면 아마 평균 이상으로 결과물을 만들어올 것이다. 여자P가 반한 남자M과는 상대적으로 적게 대화를 나눴으나, 나는 그 역시 인재라고 생각한다. 누가 더 뛰어난 지를 비교하는 무의미한 짓은 하지 않겠다.
난 어떤 일에 있어서 뛰어난 사람과 뛰어나지 않은 사람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며 내게 그 둘을 분간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못"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일못"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보는 내가 판단하기에, 여자P와 남자M은 비슷한 정도로 뛰어나다. 한쪽이 압도적으로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나는 여자P가 "멋있었어요"라고 할 때 좀 의아했다. 니가 쟤를? 대체 뭐가?
그 남자의 나이
그 남자는 그 여자보다 나이가 많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남자의 나이는 여자의 환상에 기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나이가 많은 남자는 왠지 '나'보다 더 많은 경험을 했을 것 같고, 거기에서 얻은 경험이 더 많고, 또 성숙할거라 보는 듯 하다. 그리고 남자가 나이가 많으면 '나'보다 능력이 뛰어날거라고 보는 경향도 있다. 그럴듯한 이론이긴한데, 예외가 워낙 많기 때문에 믿지 않는 이들도 많다(그렇다고 어린것들이 뛰어나다고 볼 것도 없긴하다).
하지만 그 남자가 나이가 많다고 하더라도, 이 부분만 가지고는 여자P가 남자M에 반한 이유를 설명해낼 순 없다. 그녀보다 나이많은 수많은 남자들 중에 왜 하필 남자M인지가 설명이 안되는 것이다.
왜 하필 남자M인가?
우린 아마 답을 얻지 못할 것이다. 바로 여기서부터가 이론이 설명해주지 못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진화심리학으로 남녀간의 연애를 설명하려고 하는데, 그런 이론들은 왜 하필 그 남자M이 선택되어야하는 지는 설명해주지 못한다. 남자들이 어린 여자를 좋아하는 이유를 진화심리학이 설명해주는 듯 보이긴하지만, 정작 그 남자가 그 여자를 좋아하는 이유, 즉 개별 사례를 분석할 때에 있어서 진화심리학은 딱히 이렇다할 실효를 보이지 못한다.
위에서 나는 그녀의 환상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 환상이 이론이 설명해주지 못하는 부분이며 사랑이 시작되는 부분이라고 본다. 우린 아마 영원히 한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이유를 설명해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오빤 내가 왜 좋아?"에 대답하는 게 훨씬 난이도가 낮다. 이 질문에 훌륭히 답하기 위해선 질문자를 만족만 시키면 되는데, "왜 사랑에 빠지는가?"라는 질문에는 왠지 과학적 설명이 있어야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될리가 있나.